근자씨의 서재 - 난 그래도 에로스의 부활을 꿈꾼다
에로스의 종말 AGONIE DES EROS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알랭 바디우 서문 / 문학과 지성사
에로스가 감각적이거나 열정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이미 종말을 맞이하였다.
아무리 에로스가 종말한 사회라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에로스의 부활을 꿈꾼다.
왜 지은이는 에로스가 종말 했다고 했을까?
부활을 꿈꾸는 나는 이 책을 읽어야만 했다.
서문 - 사랑의 재발명 (알랭 바디우)
p. 6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
(나는 이 두 문장으로 ‘에로스의 종말’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로스가 ‘진정한 사랑’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타자의 실존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 사람의 배경이나, 직업, 집안, 학벌, 연봉이 아닌 그 사람의 성격, 삶을 바라보는 시선, 좋아하는 것 들… 뭐 이런 것들의 타자의 실존이 아닐까?)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p. 29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사람들을 부려 먹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p. 47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3장 벌거벗은 삶
p. 50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p. 51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에스앤에스를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팔로워들은 인플루언서라는 타자와 동일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을 모방한다. 에로스의 종말은 ‘동일성의 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p. 57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p. 59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자기 파괴 뒤에 타자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에로스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p. 64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벌거벗은 삶: 모든 것이 가시화되고, 신비와 내면이 사라진 세계. 에로스는 더 이상 머무를 공간을 잃었다.)
제4장 포르노
p. 70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5장 환상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누군가를 과대평가”하고, “그에게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그를 이상화”하게 된다.
(가짜 뉴스와 잘못된 정보에 대한 확신은 그릇된 상상력을 배가 시키고. 그 상상을 다시 확대 재생산하게 만든다. 그렇게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p. 80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p. 81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제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예술의 위기 → 에로스의 종말이 원인)
6장 에로스의 정치
p. 84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 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p. 87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 준다.
7장 이론의 종말
p. 93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 미셸 뷔토르 (Michel Butor)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어려운 단어와 쉽지 않은 문장구조가 내가 ‘글자’를 읽고 있는지 ‘글’을 이해하면서 읽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에로스를 통해 얻을 수 있던 도파민을 이제는 다양한 경험과 활동(심지어 약물)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환심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고백을 할까?
언제 손을 잡고 키스를 할까?
하나하나의 단계를 완성할 때마다 우리는 도파민을 얻었다.
하지만, 비용과 시간, 체력과 감정소모가 높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은 지금, 과연 에로스를 통해 도파민을 얻을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도파민의 질이 너무 다르다.
쉽게 얻을 수 없기에, 그 도파민은 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