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까지 로그로뇨(Logroño)에 도달해야만 했다. 그게 그와의 약속이었고 평소 걸음대로라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끼여 그나마 몇 개 열었던 숙소마저 휴업인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약속을 지키기엔 하루가 부족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에게 얘기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티켓팅을 마친 상태였다. 평소 약속 지키는 것을 목숨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틀 치를 하루 만에 걸어 일정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이다.
팜플로나에서 대개는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걷는데 난 그 두 배의 거리에 있는 에스떼야(Estella)까지 걷기로 했다. 전날 20km 정도로 짧게 걸어서 기운을 보충해 준 덕도 볼 수 있으리라.
5시에 일어나 짐 싸고 아침 챙겨 먹고 6시에 길을 나섰다. 어제 적게 걸은 게 컨디션에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까지 거의 한걸음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맘껏 누리다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다행히 점심때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30분 동안 커피와 빵, 직접 짠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기운을 보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은 30km가 넘으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다리는 자꾸만 땅이 끌어당기는지 지면에서 떼기가 힘들었다. 발바닥도 뜨겁게 달궈진 열판 위를 걷는 것처럼 몹시 화끈거렸다. 처음엔 2시간에 한 번씩 쉬다가 1시간에 한번, 40km가 넘으면서는 10분마다 한 번씩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그러자 둘째 아들 또래 남학생이 친구들과 지나가다가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에스떼야 30분"을 외치며 힘내라고 했다. 기특하고 고마운 녀석.
'근데 지금 나는 3분도 못 걷겠거든.'
숙소에 도착예정시간이라고 알려준 5시를 한참 넘기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곧 세상이 어둠 속에 파묻힐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