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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l 27. 2017

단단한 사람

상처는 소화가 안 돼.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짐작컨대 단단했던 기억은 중학교 때 이후로 없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언젠가 사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나름대로의 아픈 시절을 견딘 나에게 하는 기특함도 있다. 과거를 꺼내는 일은 매번 과거에 얽매인 사람인 기분이 들어 모른 체 하고 싶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니 인생 전체가 온다는 말처럼 진실되게 누구를 대하고 생각하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게. 경박하지 않고 우아하게. 적당히 먹고, 골라 쓰며, 푹 자는 하루. 그러나 하물며 우리는 지척에 있는 가족에게도 진지하지 못하지 않은가. 소망하는 바는 이루려는 노력없이 제 멋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제 풀에 지쳐 떠나는 날, 고장난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이 되었다는 깨달음인 척 할 뿐.


여러 사람과 얽혀 말을 주고 받는동안 밑천이 바닥나 할 말이 없었다. 뼈 있는 말을 두드려 맞고 멀쩡할리가 없었다. 비난하지말고, 헐뜯지 말고. 난 참으로 변한 것 없이 살았구나.




상처는 되새김질 하지마.

여유가 생겼다는 착각에 곪는 줄도 모르고 할 말을 삼키길 몇 번. 뒷 말을 하지 않겠노라 했는데, 뒤늦게 친구와 욕을 했다. 우린 그러지 말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애쓰지 말자고 말을 했어도 그게 참 잘 되지 않았다. 가루가 되도록 곱씹고 곱씹다 보면 소화가 되지는 않을까.


괜찮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길 며칠, 밖으로 나섰다. 뭐라도 써 볼 심산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배가 고파 일행과 저렴한 식당에 발을 들였다. 가격은 거짓말이었고 우습게도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쁘기에 두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두둑히 먹은 배가 불러 마을을 거닐다 뭐라도 하지 싶어 생각이란 걸 해 보았다. 골목을 거닐며 낯선 사람들에게 아는 체 하는 일을 그들은 얼마나 받아줄런가. 후식을 먹자는 일행의 제안에 가위바위보를 하고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순간 눈길에 닿은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얼마나 아장아장 걷는지 보폭을 맞추는 엄마의 섬세함에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안녕.


그 때의 난 아이스크림을 왜 내밀었는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그대로 하고서 손을 내미는 녀석에게 괜히 짓궃고 싶었다. 아니 입을 벌려봐. 아- 하고. 아직 이도 나지 않은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차마 깨물지 못한 채 살짝 맛보곤 다시 새침하게 엄마와 제 갈길을 걸었다.




해가 지고 거리를 걷다 다시 아이와 엄마를 만났다. 안녕. 똑같은 말의 똑같은 높이로 안녕이란 말을 했던가. 아니면 나는 너와 한 뼘 쯤 가까워졌다는 친근함이 깃들었던가. 기억은 없다. 그러나 꼬맹이가 손을 흔들기 시작하며 마음은 일렁였다. 그리고 아이는 웃었다.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것은 어떤 계기로부터 온다. 사람은 켜켜이 쌓은 삶의 경험대로 그 값어치를 고스란히 산다지만, 가끔은. 어처구니없이 허무한 일로 잔뜩 무너져버린다고. 왜 아득바득 나를 꾸미려 애썼던가. 이리도 쉬운 진심에.


그깟 생채기도 상처냐며 다시 말할 날은 생각외로 금방이다. 스스로 단단해지는 것이 어려워 두렵다면 느린 것은 이미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당신을 채근하지 않으니. 볼펜의 잉크가 전부 마르고 연필의 심지가 닳아 해져도 까짓것 하나 더 구해 기다릴 생각도 있다. 걱정말고 온화하게. 함부로 타인에게 마음을 맡기지 말자. 낯선 이가 어지럽히도록 허락하지 말자.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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