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Feb 01. 2019

경험의 유통기한

쉰내 나는 어른


 여행을 준비하는 누나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오래 지낸 시간을 기억하고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주변인 중 가장 제격이라 여겼기 때문이라 짐작할 뿐이다. 누나가 나의 여행을 기억해주는 만큼, 나는 누나에게 진 신세를 기억했기에 지난 경험을 총동원하여 도와주었다. 숙소부터 맛집, 추천 여행 경로와 이동 방법까지. 일종의 인간 가이드 북인 셈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일컫는 정보들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도 있다.


 "누나, 그쪽 방향으로는 엄청난 오르막길이야. 숙소를 그곳에 잡았다간 종아리 근육만 몽땅 늘어서 돌아올걸.”


 이런 정보는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에서 다루지 않기에 나의 말 한마디로 누나의 믿음은 굉장히 늘었다. 다양한 이름과 상표들을 차치하고도 여행에서 벌어질 사소한 불편함을 먼저 짚어주는 것은, 젊음과 제법 멀어진 사람에게 탁월한 조언이 된다. 감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찌나 뿌듯하던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 대화의 문제는 엉뚱한 곳으로부터 터졌다. 이동 방법에 관련하여, 난 어느 나라의 국경을 넘기엔 버스만 한 게 없다는 말을 했는데 누나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버스정류장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 아닌가. 괜히 짜증이 일어서 직접 찾아주겠다 으름장을 놓았는데, 정말 누나의 말대로 장소가 나타나질 않았다. 어, 이게 아닌데.


 알고 보니 버스정류장은 진작에 이전하여 사람들을 여러 갈래로 실어 나른지 오래였다. 사람이 늘어난 탓에 낡은 건물을 허물고 큰 건물을 새로 만들었다고. 그 사실을 모른 체 나의 기억만 믿었더라면 누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 엉뚱한 골목을 헤매고 있었을 테지. 그러나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한참 동안 누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간 수없이 반복되었던 배웅과 마중,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던 날이 삭제된 기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느리지만 꾸준히 변한다. 위치에 따라 흐름의 속도는 다르더라도 어디가 되었든 그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경우가 잘 없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은 전부 철 지난 정보인 셈일까. 여태 시간을 관통한 도시의 시간 일부를 뚝 떼어 겪어놓고, 이후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런 사례는 흔히 꼰대라 부르는 사람들의 경험론적 사고방식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경험을 듣노라면 영원히 업데이트되지 않을 것 같은 큰 벽으로 느껴지곤 한다. 내가 위기의식을 느낀 지점은 그랬다. 주먹을 꽉 쥐고 벽을 깨트리는 무리에 있다가, 스스로 알게 모르게 꼰대의 울타리로 넘어선 기분이 들어서.


 '내가 이런 인간이라니 너무 끔찍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누나에게 곧장 답장하여 새로 신설된 버스 정류장과, 누나가 검색한 정보가 옳은 것이었으며, 내가 알려준 정보도 다시 체크할 것을 권유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는데, 평생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얼굴이 내게 스며든 형상이 비치는 꿈을 꾼 기분이었다. 때를 박박 씻는 것처럼 누나에게 요란하게 굴었지만 누난 영문을 모르는 투로 대답하는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사람은 경험을 기억이란 냉장고에 가두어 놓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득 차면 그만큼 든든한 기분이 되어 의심 없이 믿는다. 이건 인류의 오랜 관습으로 '아, 이쯤 진화했으면 좀 버릴 법 한데.'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경험은 음식과 같아 너무 오랜만에 꺼내면 먼저 의심부터 해보아야 하는 것인데. 냉장고에 넣어 두면 영원할 것처럼 군다.


 종종 이해는 간다. 기억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는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걸 대화의 큰 비중으로 채워 넣으니까. 그러니 가끔 여행 이야기를 할 때, 이를테면 2013년의 스페인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난 그 당시의 스페인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와 당신과 나 사이에 접점이 없던 2013년에도 내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쪼록 경험에 갇혀 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자주 꺼내보고 상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또 자주 상기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반대로 상한 것은 끈적끈적 달라붙기 전에 얼른 버리고 그래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쉰내 나는 어른이 되고 말겠지.


이전 03화 거미는 날아다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