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Feb 08. 2019

헌 밥

새 밥을 지어먹는다는 건


 애인이나 손님이 집에 오면 요리는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썩 잘하는 것을 떠나 대접하는 맛이 온전히 내 것이길 바라서 그렇다. 더러 괜찮은 맛이 나오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아쉬워 무진 연습을 한다. 일이 끝나고 피곤한 기운에 라면 물조차 올리기 쉽지 않을 때, 전단지에 붙은 다양한 음식을 뿌리치기 힘들다. 마음을 다잡아 쌀을 불리고, 혹은 면을 삶고, 육수를 내거나 소금을 꼬집어 뿌리는 행위를 스르르 하고 나면 완성된 요리에 기운을 차린다. 내 입맛에 꼭 맞아 맛이 있는 음식들은 뿌듯하게 즐거운 것이다.



 나는 보통 집에서 쌀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들면 대중없이 과하게 먹게 되는 게 하나의 이유고, 드문드문 생기는 쌀벌레같이 보관에 용이하지 않아 1인 가구의 식재료에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 둘의 이유다. 그중 가장 싫은 마지막 이유는 밥의 차이를 결정짓는 조리의 불가역적 특성 때문이다. 면이야 삶다가 꺼내면 다르게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쌀은 중간에 된밥을 퍼내고 연달아 조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된밥과 진밥을 원하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으면 한쪽은 자신의 취향을 강제로 포기하고 말아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난 식구가 일곱이었다. 이모네 식구와 함께 사는 탓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밥솥은 하나였다. 큼지막한 솥에 쌀을 불려 씻고 밥을 짓는다. 다른 반찬을 요리하는 동안 밥 냄새가 솔솔 나고 가족은 하나 둘 상으로 둘러앉는다. 아버지는 매 끼니마다 밥에 관하여 싫은 소리를 했다. 떡처럼 질디 진 밥을 좋아하는 당신은 알맞게 익은 밥이 설익었다며 어머니를 타박하는 것이었다. 싫은 소리는 매 끼니로 이어져 십몇 년간 하루 세 번씩 듣는 말이 되었다. 어머니도 고집이 만만치 않아 그깟 밥솥 하나 사면 될 일을 오래도록 죽어라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가 심하게 구는 종종 난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 “나는 된 밥이 좋은데.” 어머니 편을 든답시고 그랬다. 그러자 어머니는, 저것도 지 아비 닮아 밥맛을 가린다고 되레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된 밥이든 진 밥이든 결국 밥맛을 탓하는 것에 매한가지라 더 말을 않고 말았다.



 결국 새 밥솥을 하나 들였다. 둘 혹은 넷 정도 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밥솥이었다. 쌀을 씻는 일도 밥솥을 씻는 일도 두 배로 늘었고 싫은 말은 더 없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지금은 물론 일인용 밥솥이 종종 보여도 그땐 아니라서 가장 작은 밥솥을 구한 모양인데, 꼭 진 밥 한 공기가 남는 것이었다. 와중에 아버지는 헌 밥을 결코 먹지 않는 양반이었다. 아주 질어 죽 같은 밥을 어머니가 먹거나 버리기도 했다. 늘 새로 밥을 짓는 게 한 공기는 불가능한 일이라 곤욕이었다. 나와 다른 식구는 된밥을 좋아하고 굳이 진밥에 손댈 이유가 없는 탓이었다. 그렇게 먹지 않는 밥은 곧장 헌 밥이 되었다.




 지금 내가 쓰는 밥솥은 보온이 되지 않는다. 냄비밥을 만드는 원리라고 하던가. 한 명에서 최대 세 명까지 먹을 양의 밥을 짓는 밥솥은 미련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다. 애인은 밥을 보관할 수가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왜 그런 것을 사 두었냐 물었다. 늘 새 밥을 지어야 하는 불편함은 몇 번 밥을 만들어 먹어보고 곧바로 뭉개져 본인도 납득을 했다. 새 밥은 정말 맛이 좋네. 애인의 감탄에 기분이 부쩍 좋아져 말한다.



새 밥을 지어먹는 건 스스로를 존중하는 일이야.


 부지런히 쌀을 씻어 새 밥을 지으며 헌 밥을 잘 만들지 않는다. 물을 맞추는 것이 늘 나의 입맛에 맞춰져 밥의 질기가 나에게 가장 맞다. 식사에 공을 들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정성스레 식사를 만들어 나에게 먹이는 일이 가장 좋다. 가족은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입이 줄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밥에 투정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밥이 여전히 남는 일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쌀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면이나 혹 빵을 먹는 사람들이었다면 아마 다른 모습이 되었을까. 그냥 다른 불평을 하는 사람들로 여전했을까. 이제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칼질에 집중해야 손이 베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세 명분의 밥 밖에 만들지 못하고 보관도 되지 않지만 나의 밥솥은 영특하기 짝이 없다.

이전 04화 경험의 유통기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