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비행
땅이 젖은 뒤에 마당을 정돈한다. 바람에 뒤집어진 의자나 가시덤불이 자라지는 않았는지, 달려있는 전구의 갓등이 날아가지 않았는지. 손이 필요한 곳은 눈에 보인다. 잔디 깔린 마당이란 손질해 주지 않으면 금세 보란 듯 고개를 쳐들어서 사람 속을 긁는다. 눈으로 보고도 예민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있으면 끈적한 것이 몸에 달라붙는다. 큼직한 거미줄이다.
어쩜 저렇게 거미줄을 쳤을까. 거미는 제 몸보다 거대한 줄을 풀어 영역을 넓히는데 한 뼘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인간의 몸보다 큰 것이 될 때도 있다. 멀찍이 떨어진 건물을 길게 잇는 실력을 보자면 여느 건축가 못지않아 감탄을 멈출 수 없다. 값나가는 부동산 열기를 피해 틈새시장을 노리는 승부사다. 이런저런 곤충이 잘 지나다니는 길을 골라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재택근무까지! 거미의 삶은 아주 멋진 것이로구나.
감상을 마치고 집을 부순다.
잿빛 감상은 그의 너른 집을 부술 때까지만 계속된다.
거미가 날아가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가장 긴 다리를 곧게 뻗어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는 엉덩이에서 긴 실을 뽑아 짐작한 풍향과 세기가 맞는지 확인하고는 준비 자세 후, 그대로 슝. 아주 귀한 영상이라 세계에 몇 없는 것이라 한다. 징그러워하는 사람이 많아, 발견하면 죽이기에 바빴는지 거미의 일생은 비밀투성이다. 괜히 음산하고 징그러움을 유발하는 외모에 애완용으로도 인기가 많지 않다. 그런 거미가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자신의 끈적이는 실로 이어 붙이려 하는 노력을 본 이들은 줄곧 거미를 따라다녔다. 집을 부술 때마다 너무나 궁금한 것이다. 이렇게 한 점 늘어지지 않고 탄력적이며 단단한 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공사용 가설물 없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그런데 아뿔싸, 거미는 날아다닌다.
거미의 비행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한 일이다. 학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수치를 계산할 수 없어 곤욕이었다고 한다. 날갯짓 없는 거미의 비행을 계산하려 한 어떤 학자는 일생을 바쳐 가장 근사한 값을 계산했다는데 나는 이것이 ‘일생을 바칠만한 일’인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난 인류를 통틀어 가장 모자란 사람은 아니라, 그 생각이 얼마나 섣부른 오만인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호기심에 미쳐버린 몇이 일생을 바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거미가 어떻게 집을 짓는지 몰랐을 테니까.
어떤 일에 일생을 바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맛도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멋도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분야마다 미쳐버린 사람들이 꾸린 세상을 보는 재미로 시간을 탕진하기에 신이 난다. 맛이며 멋이 있는 것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데, 어디서 감히 보잘것없음을 구분하는지. 맘에 드는 맥락이 아니면 무시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함도 병이다. 더군다나 거미가 비행하는 광경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멋지지 않은가. 산들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도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한다. 바람 부는 날의 거미는 말이다.
결국 그렇게 지어놓은 것을 부수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나와, 오래 버틸 공간을 찾아 다시 자신의 영역을 꾸미는 거미가 공존하며 사는 일에 분주하다. 거미도 욕심쟁이라 자기보다 한껏 큰 거미줄을 차지하고 욕심내기도 하는데, 나는 쓰지도 않을 천장 구석을 내 공간이라 여기고 양보할 맘 없이 매정하게 그를 쓸어 담는다. 다른 생물이라면 성을 내며 달려들기도 하겠지만 거미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도망 다닌다. 거미는 늘 그랬다. 안절부절 도망가는 것을 죽이지는 못하고 멀리 내쫓아버리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어낸다.
난 거미 인간이 되어 손에서 쭉쭉 실을 뽑아 원하는 대로 쓰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만 날면 좋겠다. 제자리에서라도 좋으니 공중을 영역으로 지내는 것을 해보고 싶다. 대롱대롱 매달리는 것에 편안함을 느껴보고도 싶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바닥밖에 누리지 못하여 이렇게 싸우는 것인가 싶어 모두 벗어던지고 딴 세상에서 군상을 보면 좋겠다.
그럼 역시 거미의 생이 좋을까.
아니, 엉덩이에서만 실이 나오면 바지를 벗고 날아야 하니 역시 그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