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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05. 2021

욕심, 양보, 공존

번외 - <아파트 밧줄 사건에 대하여>


 배달하던 때의 일을 쓰고 있다. 고객의 입장, 식당의 입장, 배달의 입장을 고루 모아 적으려 한다. 그런데 자꾸만 배달에 관해서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배달을 하기 전에는 배달원이 음식을 빼먹는 일이 이슈가 되었고 배달을 시작하고서는 아파트(합정의 그 유명한) 갑질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배달 시절의 기록을 남기는 지금은 아파트와 배달원의 대립이 터졌다.


 나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세 입장의 인간이 모두 되어보았다. 배달원을 해봤고, 경비원을 해봤고, 아파트에서 배달을 기다리는 고객이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의 입장이 뼈저리게 이해가 가서 누굴 콕 집어 옹호할 수가 없다.




 배달원은 지상 출입이 금지된 아파트에 진입했다. 이건 단지 내부에서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면 법적으로 불법주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문제다. 나 역시 그런 아파트에 몇 번 배달을 했고 한 번은 경비실 옆에 오토바이를 멈춘 뒤 3백 미터가량의 가장 안쪽동까지 걸어 들어가야 했다. 둘째로는 진입금지 팻말이 설치 전인 아파트였고 경비원이 없어 몰랐다. 돌아 나올 때 해당 사건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비원에게 느닷없는 욕설을 먹었고 몰랐던 것에 대해 사과하겠으나 욕설은 사과받아야겠다고 하다 다툼이 생겼다. 이후로 신식 아파트 단지의 콜은 일절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누구도 배달원에게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라고 할 수 없다. 그 말은 배달원이 스스로에게만 할 수 있는 작디작은 위안이다.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배달하면 될 것이고 감수할 수 없는 사람은 콜을 거부하면 된다. 난 후자였다.


 경비원은 하루 종일 수많은 민원을 받는다. 아파트라는 공동체의 성격상 입주민의 수가 하나로 모아지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입주민 공동회에서 결정된 다수결의 입장이 경비원의 일을 대변한다고 봐도 된다. 그렇지만 나머지 소수의 입장은 단순히 가라앉지 않아서 경비원은 매번 요청하는 사람마다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사람이 오토바이를 따라잡을 수 없으며 24시간 경비실에서 배달 오토바이만 잡아 유도할 수 없으니 구멍이 생기는 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늦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나도 당신도 모두가 안다. 민원인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고,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입주민은 경비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월급을 주고 배달원은 자신에게 마땅한 영향이 없다. 배달원을 제지하는 목적은 그뿐이다.


 아파트 거주민은 그 자체로 다양하지만 주거형태로써의 다세대주택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생각하면 이 사건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수월하다. 아파트의 비싼 값을 생각하면 공용공간에 대한 권리를 누리고 싶고, 아이가 있다면 안전함을 느끼고 싶고, 배달이 용이한 거주지 주민으로서의 지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새벽 두 시에도 배가 고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날에는 새벽 두 시의 배달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를 다 겪은 바, 다세대주택에서 자유권에 대한 결괏값은 하나다. '내 집인데.'





 이 사태는 어느 누구의 일방적 희생이 해결방안으로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배달원이 아파트의 규정을 따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테고 시간 손실에 대한 보상을 추가 지불하면 해결된다. (실제로 어떤 아파트는 그런 방식의 해결을 했다.) 아니면 위에 적었듯 콜을 거절하면 된다. '그 값에 갈 수 없다'는 의미의 거절이다.


 얼마 전엔 어떤 아파트에 대해 택배원들이 물류 배송을 거절하는 사건이 있었다. 차량의 높이 문제로 지하주차장을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다르지 않느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이기심은 같은 문제다. 같은 값을 지불하고 집 앞까지 와줬으면 하는 수고를 원한다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함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의 5층 주민은 배달음식을 받기 위해 현관까지 나오고 싶지 않아 하고 시간당 2-3건을 채워야 최저시급이 맞춰지는 배달원은 경비실부터 10분 넘게 걸어야 하는 아파트를 가고 싶지 않다. 경비원 역시 매번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을거고.


 그렇다면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미 바닥을 친 오토바이 배달의 세계에서 불법행위는 왜 근절되지 않을까. 될 대로 되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안전운행을 해도 충분하다는 사람 역시 있다. 매 순간 시간에 쫓기는 조급함과 시간당 돈벌이에 대한 욕심이 무한 경쟁구도로 인해 폭발한다. 어렵다. 사람의 마음이란, 세상이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욕심과 양보는 공존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변호해야 하는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만 뽑는 기자들, 편을 가르며 왈가왈부하는 이들 역시 누가 옳든 상관없이 구현될 정의에 취해있을 뿐 아무도 근본적인 해결 방안에 대하여 합의하지 않는다. 배달에 대한 글을 적으며 관계와 사회가 뭘까 생각한다. 그저 존엄성을 지켜주고 책임감을 요구하되, 차별하지 않고 사명감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


 과거 드라마 따위에서 심심찮게 주인공이 외치던 '따따블!'이 떠오른다. 급한 상황에 값을 더 지불하는 게 당연시되기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다. 급한 상황에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값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다. 버스 대신 기차를, 기차대신 비행기를 타듯. 배달은 그럼 어느 위치일까. 고객은 떠올려야 한다. 이건 세금과 수수료를 뗀 3천원 짜리 속도라는 것을. 배달원은 인정해야 한다. 촉박한 시간일지언정 타인에게 위험을 줄 자격이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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