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사랑

by 박한얼 Haneol Park


상상도 못 했다.

청소기 막대로 초등학생의 몸에 피멍이 들 때까지

아무런 이유 없이 때려대던 사람을

그래 놓고는 본인이 그랬는지 기억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될 줄이야.


꽃다운 내 나이 스물다섯.

분명 유치원생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아빠가 참 좋았다.

돈은 잘 못 벌어도 성실하진 못해도

종종 맛있는 밥피자(밥을 도우 삼아 얇게 깔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치즈, 햄 같은 토핑을 올려 전자레인지에 구워주셨었다.)도 만들어주셨고

재밌는 게임들도 같이 해주셨고

재밌는 지브리,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보여주셨던

정도 많고 화도 많고 자존심도 세던

그게 매력이었던 우리 아빠.

내가 하필 사춘기를 겪기 시작할 때쯤부터

아빠는 알코올 중독(현재는 알코올 의존증이라 부르는 추세지만)이 시작되었다.

본인이 느끼는 패배감을 술으로라도 이겨보려 애쓴 것이라고... 굳이 포장해주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난 정말 이유 없는 폭행(신체적, 정신적 전부)들을 견뎌내며 자랐다.

그런데 오냐오냐 예쁨만 받고 자란 외동아들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판단한다.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

내가 이렇게 어리바리한 건 집사나 하녀가 다 챙겨준 왕자님이라서가 아니라

날 챙겨주는 어른이 없어서 외롭고 힘들었었기 때문이라고.

몸도 마음도 다쳐서라고.

야무지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라고.

난 그때 고작 열두 살이었다고.


꽃다운 내 나이 스물다섯.

요즘 아빠가 좋다.

술을 끊으셨다.

나이가 60이 다 되어가니

이제야 그렇게 패배감에 아등바등했던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은가 보다.

자기가 이상한 거였다고, 세상이 이상한 게 아니라

자기가 비정상인 거라는 얘기도 한다.

항상 남 탓, 세상 탓만 하던 사람이

본인의 인생에 책임지는 말까지 하게 될 줄이야.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랬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맞아, 아빠는 뿌리부터가 맑고 깨끗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돈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이건 좀 말에 어폐가 있지만...ㅎ)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대한다.

그런데 그 맑은 뿌리를 썩어버리게 만든 것들은

정말 아빠의 탓이 아닌 것이다.

말해주고 싶다. 그 모든 고통들은 절대 아빠 탓이 아니었다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꽃다운 내 나이 스물다섯.

아빠의 인생에 목표가 생겼다.

하시는 공부도 생겼다.

그 목표를 위해 술도 끊었고 이젠 담배 끊기에 도전하고 계신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쿠팡 라이더스로서 배달 일도 하신다. 보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열심히.

난 어제 새벽에 감히 치킨을 시켜먹었다.

치킨을 배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도대체 그런 일탈을 어떻게 할 수 있겠으며

배달음식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아빠 말대로 직업엔 정말 귀천이 없는 게 맞다.

배달일 해주시는 라이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꽃다운 내 나이 스물다섯.

이 문장이 왜 자꾸 나오냐면,

달라진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술에 절어있지 않은 평상시의 모습을 본 게

거의 20년 만이고

내가 5~9세였던 시절의 아빠를

다시 마주하고 있 것이고

그래서 요즘 나는 그때로 타임워프를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성인이 된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아빠의 그런 모습들에서 향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스물다섯이 된 게 맞나?

아빠가 너무 기특하고 좋다.

이렇게 스물다섯이 된 내가 기특하고 좋다.


괴물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도 커서 괴물이 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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