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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한얼 Haneol Park Sep 30. 2023

내 인생의 전환점

오늘의 생각 #51


우리 아빠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리와 진실을 추구한다. 추구를 넘어서서 집착에 가깝다.
선과 악, 옳고 그름, 불행과 행복, 기쁨과 슬픔, 진실과 거짓 사이에 사랑과 배려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선이 아니면 악, 옳지 않다면 틀린 것, 불행하지 않아야 행복한 것, 기쁘지 않다면 슬프고 괴로운 것, 진실이 아니면 거짓임으로 믿는다.
모든 게 다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게 동시에 다 같은 곳에 있다는 개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서 두려워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들이 모두 '사이'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희생적인 을 산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이해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거부하고 외면하다가 늘 상처투성이가 되어 병든 닭처럼 알코올중독이 되곤 했다.
심지어 순교자처럼, 그러한 희생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언제나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우리 아빠는 죽을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늘 자신의 희생과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질서에서 무질서를 창조하는 그의 파괴적인
드디어 끝나는, 지옥 같은 인생에서 탈출해 그토록 염원하던 천국으로 가는 유일 '순간'일 테니 말이다.

우리 아빠의 과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렇게 희생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 치고는 세상 물정에 굉장히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세상이 건네는 부정적인 메시지들에 너무도 쉽게 유혹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너는 실패자다, 너 같은 사람은 사회에 쓸모가 없다는 등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잔인한 말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자식 농사가 망했다며 아빠를 망한 자식 취급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평생 아빠를 그렇게 대해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행운인 것은 그런 아빠를 늘 사랑으로 품어주는 바다 같은 마음씨를 가진 우리 엄마와 결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 이토록 나약함과 분노에 휩싸인 자신이 자살하거나 주변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강하게 억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의 기준이 필요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받음을 느끼게 해주는 진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한 기준과 진리는 늘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아빠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 속에 있었고 아빠는 남은 여생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나는 그저 아빠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늘 아빠의 허무맹랑한 소리에 참다못해 화를 냈다가도, 또 자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고 이제는 나이 들어가는 아빠가 귀여워 보일 때도 있다.
내 안에 이렇게나 큰 사랑이 있는데,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수용하고 존중하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아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0대 때 어느 순간 가슴이 뻥 뚫려있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고 공허했다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이런 커다란 결핍과 공허감은 뇌과학적으로는 좌뇌의 자아 중추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뉴런 연결이 자주 반복 되어 신경 속에 강하게 학습되고 고착화된 것이다.
아빠가 유년기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할아버지는 늘 외부 세계에서 성취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때문에 늘 외로워하셨다. 부부싸움은 끊일 날이 없었으며 수많은 할아버지의 여자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야 했던 10대 때의 아빠는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알코올중독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나의 10대를 떠올려도 참 힘들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또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일찍이 가출해서 따뜻한 사랑과 보호 없이 오롯이 혼자서 생존해야만 했던 그 시대의 절박하고 끔찍했던 할아버지의 10대는 또한 어땠겠는가.
내가 이 박 씨 가족 장남들의 불행의 족쇄를 풀어줄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참 다행인 것은, 내가 아빠와 할아버지를 통해 각각 어떻게 살면 불행해지는지 배울 수 있었다는 이다. 사람이 외로우면 얼마나 처량해지는지를 말이다. 어차피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는 본인의 영혼만이 아는 것이니까 내가 알아서 찾아가면 되고, 불행해지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은 정말 큰 선물이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돈과 사회적인 성취로 해결하려 했고,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의 방식에 반감이 있어서 돈과 성취 빼고 다른 모든 걸로 해결해 보려다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하나님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돈과 성취를 소망하고 있다. 바라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빠는 내가 돈이나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게 평생 괴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면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텐데 그런 극히 부분적인 조건을 따지면 안 된다고 한다. 솔직히 처음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시 보니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모티브와 삶의 영감을 주고 싶고, 내 능력으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좋은 환경에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보면서 살게 해주고 싶다. 물론 이렇게 되지 않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소망하는 내 마음이 소중할 뿐이다. 이뤄지면 이뤄지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뤄지지 않는 대로, 나는 내 안에서 스스로 회복하고 스스로 성장하며 스스로 강해지는 사랑과 보호의 몸이다. 인정하고 이해하며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또한 기쁜 사람이다. 돈과 사회적 성취도, 내 안에서의 편안한 행복과 자유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감사하게도 그것을 할아버지와 아빠에게서 배웠으며 나는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능력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창조해 나갈 것임을 안다. 어떤 일이든 나와 우주의 의도가 겹쳐져있음을 알고 그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완벽이라는 허영을 추구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부족한 대로 만족하는 것이 곧 우주에 대한 감사와 매너임을 안다. 천천히 가는 것이 똑바로 나아가는 것임을 안다. 누군가가 날 무시하거나, 내가 버림받거나, 실패를 겪는다고 해서 좌절하도록 허락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님을 안다. 그것이 평생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인과론에 파묻혀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를 찾고 미스터리를 해석하는 자기만의 잣대임을 안다.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애초에 그 또한 뜻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애초에 나는 그 뜻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 안에서 퍼져나가는 우주에 대한 존경의 표시임을 안다.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진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나의 부모로서, 창의력으로서, 사로서, 연인으로서, 소통하는 아이로서, 선지자로서, 현자로서 살아가길 원한다. 우리의 곁에는 늘 희생자, 순교자, 하인, 연기자, 침묵하는 아이와 사상가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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