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커피를 먹고 나면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남아서 만족스러운 커피를 먹을 때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된다.
좋은 원두를 사서 내가 직접 내린다던지, 내 경험상 맛이 검증된 곳을 찾아간다던지.
오늘 점심으로 따끈한 라멘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러 주변 카페에 들어갔다. 리뷰가 꽤 좋은 편인 것 같아 흔쾌히 한 잔에 만원씩 하는 게이샤 필터 커피를 주문해 보았다.
대표님이 커피에 대한 경험과 철학이 견고해 보였는데, 내가 어떤 질문을 하거나 느껴지는 향과 맛을 말하면 나를 굉장히 초보 취급하시고(물론 초보가 맞지만!) 자기가 다 안다는 듯이 말씀하셔서 약간의 반감이 느껴졌다.
겸손함도 느껴지지 않았고, 자기 잘난 맛에 카페를 운영하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페 로고나 원두 패키징도 올드하고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부분에서든지 철학이 견고하다는 게 자칫하면 과신과 거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만의 철학이 있다는 것은 사업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도 과하면 안 될 것 같다.
커피맛도 솔직히 그저 그랬다. 맛과 향 가운데에서 충분하게 받쳐주는 단맛이나 바디감이 모자랐다. 꿀, 자스민,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는 과일 노트가 선명하지 않았고 뭔가가 부족한 느낌에 끝맛은 텁텁함이 남았다.
결국 그곳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를 찾아갔다. 연희동에 위치한 아이덴티티 커피랩!
여긴 로고에도 쓰여있지만, 추구하는 방향성이 'Clean, Clear, Essence'다. 깔끔하고 투명하고 선명한 커피. 정말 이곳의 커피들을 마셔보면 이 가치관이 그대로 느껴진다. 선명한 맛들이 느껴지면서도 편안하고 깨끗하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그런 커피를 만드는 것으로도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곳의 필터 커피나 에스프레소 커피들을 마시고 나면 깔끔하게 '잘 마셨다'라는 생각이 든다.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게다가 가격대도 합리적이다.
진짜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다! 할 때에는 싱글오리진 필터 커피를 먹고, 그냥 일상적이고 편안한 느낌의 커피를 먹고 싶다. 할 때에는 블렌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진하고 달달하게 남는 요거트의 애프터 테이스트가 너무 좋았던 에티오피아 첼첼레 워시드, 그리고 편안하고 따뜻했던 미드센추리 블렌드 아메리카노까지. 참 좋다.
나는 사람, 커피, 자연에서 느껴지는 이런 깨끗함과 편안함이 참 좋다.
사회생활, 조직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뭔가를 가면 속에 숨겨두고 사는 것은 정말이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솔직하고 수줍고 깨끗하고 편안한 것. 그런 것들로 내 일상을 꽉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완벽하지 않은 것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
그러나 지저분한 것들, 불투명한 것들, 텁텁한 것들, 알맹이가 텅 빈 것들. 그런 것들을 멀리하려면 더 비워내고 버려내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을 되새긴 하루였다.욕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되는' 것들의 흐름을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