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가 되고부터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이 생겼다. 바로 마트다. 마트는 주부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이다. 혼자 살 때는 편의점이 더 친했는데 주부가 되고부터는 편의점보다는 마트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대형 마트에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벤트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시식코너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대형 마트 안에는 없는 게 없는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대형 마트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스템이 주부인 나에게 너무나도 편리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독일에 오고부터는 마트라는 장소는 정말이지 가기 귀찮은 장소가 돼버렸다. 독일의 마트 시스템은 한국과 달리 대형 마트가 별로 없다. 물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생활권에서 이용할 수 있는 마트는 마치 한국의 동네 마트 같은 느낌이다. 구경은커녕 정말 딱 필요한 물건만 사고 나와야 하는 구조이다. 게다가 사는 집의 옵션이었던 냉장고가 작아서 많은 물건을 보관할 수도 없다. 두 끼 혹은 세끼 정도 먹거리와 아이들 간식을 넣으면 꽉 차기 때문에 일주일에 2~3번은 마트에 가야 한다.
전에 살 던 동네에서는 집 앞에 마트가 있어서 덜 불편했는데 작년에 이사한 동네는 집 앞에 마트가 없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마트가 있고 장을 본 물건을 이고 지고 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때마다 한국의 땡마트가 그리워진다. 주부 삶에서 마트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심지어 어쩌다 자유시간이 생겨 길을 나서면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가는 곳이 겨우 마트일 정도니까.
주부의 고민은 매일 똑같다. 오늘 저녁 무슨 요리를 하나 고민한 후, 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다가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한다. 가족들이 맛있게 잘 먹어주면 그나마 기분이 좋지만, 잘 먹지 않는 날에는 고생했던 나의 하루가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게 뭐라고. 내 삶을 가족의 저녁 메뉴에 걸은 것처럼.
한국에서 지낼 때 아이들에게 "마트 가자~ " 하면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한국의 땡마트는 아이들에게도 구경할 것이 많은 곳이니까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 "마트 가자~" 하면 "안 갈래요." 라는고 말한다. 아이들에게조차 독일 마트는 재미없는 곳인가 보다. 눈호강거리, 우리 입맛에 맞는 먹거리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메뉴 고민할 때마다 음식의 선택지가 다양한 한국이 너무 그립다. 가끔 아시아 마트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아시아 마트 역시 가기 귀찮지만, 독일마트보다는 살짝 구미가 당길 때가 있다. 가격이 착하지 않아서 자주 가진 않아도 그리운 한국 식품들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장 보는 재미를 유발한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 음식을 흉내 내어 먹었던 적이 있었다. 족발, 감자탕, 닭곰탕, 사골곰탕, 우거지해장국 등 그런데 이 음식 한 가지를 하기 위해 팔아야 하는 발품과 요리하는데 드는 여러 수고스러움들이 나에게는 성취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나의 하루를 온전히 그 요리에 바쳐야 하는 열정이 이제는 없다. 그래서 점점 간편한 요리, 간단한 요리를 찾다 보니 독일식도 아닌 퓨전도 아닌 명명할 수 없는 요리들이 탄생하곤 한다. 빵과 제육볶음이라든지, 셀러리김치라든지.. 동서양의 조화??
나는 정말이지 마트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귀찮은 마트를 늘 가야만 한다. 어쩔 때는 시간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아이들이 하교하기 직전 부랴부랴 달려가 필요한 것만 후다닥 사들고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 사야 할 물건 하나라도 빼먹는 날이면 그렇게 짜증이 날 수가 없다. 독일에도 온라인으로 장을 보고 배달해 주는 업체가 있지만, 내가 사는 곳은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어디 사느냐에 따라 삶의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늘 시내에 살다가 시골 언저리에 살아보니 우리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은 시내와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은 요즘 동네마다 없는 게 없고 모든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가고 있지만, 독일은 여전히 편의시설이 시내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거주하는 곳은 시내 나가려면 버스 시간 맞춰서 기다려야 하는데 버스 시간 간격이 15분~20분이다. 버스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딱 2대밖에 없다. 다행히 지하철 노선도 한 개 있지만 이것도 자주 파업하거나 지연될 때가 많다. 다행히 바쁜 시간대에는 10분 간격... 그렇지 않으면 15분, 20분 간격......
시골(?)살이를 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겠지. 맛있는 치킨 배달, 문화생활, 식당들. 그러다 보니 마트만 주야장천 가게 되어 더 마트 가는 게 귀찮고 질린 것 같다. 가도 맨날 똑같은 식품만 구매하게 되고, 그래서 요즘 관심사는 시골에서 채취할 수 있는 먹거리들이다. 얼마 전에는 우연히 집 앞에서 매실나무를 발견했다. 동네 주민이 열매를 한 아름 따가시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매실이었다. 그 길로 봉지를 챙겨 와 잘 익은 매실을 골라 한아름 따와 매실청을 담갔다. 이런 게 시골 생활 맛인가? 하면서 혼자 흡족해했었다. 도심의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성취감이었다. 지난 봄에는 명이 나물을 캐다가 맛있게 먹었고, 이번에 매실청, 앞으로도 철마나 채취할 수 있는 열매들을 찾아가는 재미와 베란다 화분에 씨를 뿌려 수확하는 재미를 느껴봐야겠다. 그러면 마트 가는 횟수가 줄어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