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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있는 모습

by 바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할머니의 옷가지와 생필품을 챙겨 요양 병원으로 향했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할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느 날엔 또렷한 기억으로 나를 반기시고,

어느 날엔 흐릿한 기억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날짜와 시간을 물으신다.


그리고 시간을 붙잡듯, 이야기를 꺼내신다.


젊은 날의 이야기, 할아버지 이야기, 돈이 사라졌던 그날의 이야기..


할머니는 몇 해 전 왼쪽 시력을 잃고

오른쪽의 흐릿한 시력으로만 삶을 지탱해 오셨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른쪽 시력마저 점점 흐릿해져,

내가 병실 문을 열고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도, 누군지 못 알아보실 정도셨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아, 너로구나.." 하고 알아보셨다.


고작 다섯 걸음 거리,

그래도 매번 알아보심에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병원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환자분과 복도 끝 창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그날은 유난히도 할머니의 얼굴이 환하셨다.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얘기를 나누던 다른 환자분에게


"내가 아는 이가 왔어요. 난 이만 가봐야겠어요. 다음에 또 봅시다."


하고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병실로 이끄셨다.

병실에 앉아있는 다른 환자분을 보시고는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아이가 왔어요. 여기 좀 봐요."


하며 나를 소개하셨다.


다른 환자분은 내게 예쁘다며 칭찬을 건네셨고,

그런 모습을 본 할머니는 기분이 좋으셨는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으셨다.


이런 상황이 마치 정말 할머니의 손녀라도 된 것 같았다.




어릴 적 나의 친할머니도 홀로 노년을 보내셨다.

동네 이웃 할머니들이 많이 계셨지만,

친할머니를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언제나 시큰하다.


언젠가 나의 친할머니를 찾아뵙던 날이었다.

그날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과 경로당에 모여 앉아,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계셨다.


많은 할머니들 속의 나의 친할머니를 발견한 나는

경로당 방 문 앞에 서서


"할머니 나 왔어! 할머니~~"


하고 소리쳐 불렀다.

몇몇 할머니들이 자신을 찾아왔는가 싶어 나를 쳐다보았는데

정작 친할머니는 나를 보지 않으셨다.

나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할머니 나야!! 서현이~!!"


그제야 할머니는


"아이고 내 손녀 왔는가?!"


하시며 벌떡 일어나 나오셨다.


자신의 손녀가 아니어서 실망한 할머니들 틈새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시는 할머니를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었다.

그리고 훌쩍 자라 버린 손녀라

단 번에 알아보지 못한 할머니께

더 많이 찾아뵙지 못했던 나의 지난날이

죄송스러웠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날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더 할머니가 그리워지곤 한다.



이웃 할머니는 내가 곁에 오래 머무를 때면

온갖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하셨다.

조금이라도 내가 더 당신 곁에 머물기를 바라셨다.


혹여 내가 시간이 넉넉지 않아 서둘러 가야 할 때면,


"바쁜데 어서 가봐요. 그리고 매번 미안하고 고마워요."


"바쁘면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언제 또 올 수 있어요?"


하며 또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나는 친할머니의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오버랩되면서,

발길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떠나가는 내 모습을 병실 문 앞에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시는 그 모습은

오래전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리운 나의 친할머니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던 손길,


등 뒤에서 오래도록 바라보던 따뜻했던 시선,


사랑을 주면서도 늘 더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마음까지,


어쩌면 나는

이 이웃 할머니를 돌보며
내 안의 그리움을 조용히 꺼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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