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이젠 엄마 사랑 안 해요?"
소소잡썰(小笑雜說)
쌍둥이 딸이 여덟 살 때 일이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온 딸들로부터 뜻밖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빠는 이젠 엄마 사랑 안 해요?"하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혹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이런저런 다른 이유들로 그 즈음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진 터라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딸들의 질문은 그쪽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왜 그러느냐고 되묻는 내 물음에 "아빠는 맨날 엄마하고 데이트 안 하잖아요" 하고 대답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딸들 질문의 요점은 왜 엄마와 데이트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딸들보다 더 어린 나이대 자녀들을 뒀음에도 부부끼리 영화를 보러 가는 등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는 이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걸 못해 오고 있었다. 특히 내가 좀 심하게 아이들을 염려하는 편이라 그랬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가 더 이상 그래선 안 되겠다고 나섰다.
이때부터 아내는 틈날 때마다 아이들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우리 딸들도 이젠 여덟 살이나 먹었으니 한 나절 정도는 엄마 아빠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엄마 아빠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기 때문에 가끔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우리 딸들이 도와줘야 해" 하며 설득작전을 펼친 것이다.
여덟 살이라곤 해도 우리 딸들은 혼자 있는 것에 아직 익숙지 못한 편이었다. 아니, 익숙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많이 무서워한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어쩌나 보려고 가끔 한 번씩 아내와 내가 저녁시간에 함께 동네 슈퍼라도 다녀올라치면 딸들은 "우린 무서워서 방에 숨어있을 거니까 엄마 아빠가 밖에서 문 열고 들어와야 해요" 하고 신신당부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내의 설득작전이 주효했던 것일까? 딸들은 뜻밖에도 "아빠는 이제 엄마 사랑 안 해요?" 하고 물으며 엄마와의 데이트를 종용하고 나선 거였다. 아내와 데이트를 안 했다간 졸지에 제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나쁜 아빠가 될 판이었다.
그렇게 등 떠밀려 예정에도 없던 데이트를 하러 나서는 길, 대충 추리닝 차림으로 나서려는 나에게 딸들은 또 한 차례 태클을 걸어왔다. 예쁜 엄마하고 데이트를 하려면 멋있게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외출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딸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아내와 내가 이날 데이트 장소로 정한 곳은 집 근처의 한 생맥주집이었다. 내가 술을 워낙 좋아하는 탓에 결혼 전엔 아내와 함께 참 많이도 들락거리던 장소인데,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한 뒤론 통 가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생맥주를 마시며 오붓하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나 아내와 나의 이 오랜만의 오붓한 데이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들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처음엔 엄마 아빠가 데이트 잘 하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고 운을 뗀 아이들은 더는 무서움을 못 참겠는지 조심스레 자기들도 같이 데이트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그렇게 하자고 순순히 응낙했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맥주집으로 달려왔다. 덕분에 모처럼만의 아내와의 데이트는 반쪽짜리가 되고 말았지만, 무서움을 무릅쓰고 엄마 아빠의 데이트를 성사시켜 준 딸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딸들이 전화를 안 했으면 솔직히 아내나 나나 많이 섭섭해 하고 괘씸해(?) 했을 것 같다. 입으로는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하게 한다고 투덜거렸어도 아내나 나 모두 속으로는 그런 아이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반가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