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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Sep 23. 2021

"작은딸, 너 남자 '얼굴' 보는 여자였니?"

소소잡썰(小笑雜說)

"아빠 아빠, PC방 알바 다닐 때 쟤 별명이 뭔지 아세요?"

모처럼 네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데, 큰딸이 동생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글쎄다.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하며 내가 말끝을 흐리자 큰딸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대뜸 "여왕벌이래요. 여왕벌 ㅋㅋ" 하고 속사포처럼 답을 쏟아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별명이라 나는 "여왕벌? 웬 여왕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큰딸은 "쟤가 저래 봬도 알바하는 PC방에선 예쁘다고 떠받듦을 받고 살아서 여왕벌이란 별명이 붙었대요" 하고 깔깔거렸다. 집에 있을 때완 달리 알바 갈 땐 좀 꾸미고 나간다 싶더니만 나름 인기관리를 좀 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얘길 듣고도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자 큰딸은 "일하다 보면 누나, 누나 부르며 쓸데없이 말 거는 애들도 많고, 사귀고 싶다는 애들도 꽤 여럿인데, 쟤가 그런 애들을 일벌처럼 막 부려먹어서 여왕벌이란 별명이 붙었대요, 글쎄" 하고 부연설명을 해줬다.


이때까지 별 말없이 제 언니 수다를 듣고 있던 쌍둥이 동생 작은딸은 "그렇게 띠엄띠엄 얘기하면 아빠가 오해하시잖아, 이 웬수야!" 하고 발끈했다. "걔들이 나한테 '누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세요' 하고 자꾸 들이대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저쪽 의자들 좀 정리하고 저쪽 청소도 좀 해' 하고 시킨 거뿐이야!"라는게 작은딸의 해명이었다.


대략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된 나는 "시내 번화가에 있는 잘 나가는 카페 같은 데선 전략적으로 예쁜 여자나 잘 생긴 남자를 알바로 쓰기도 한다던데, 우리 작은딸도 미모 덕분에 PC방 알바로 뽑힌 건가?" 하고 깔깔댔다. 평소 외모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대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누가 내 딸이 예쁘다고 한다는 데야 기분 나쁠 일은 없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딸은 "맞아 맞아, 나도 어느 대학교 앞 카페에서 잘 생긴 남자가 서빙하는 거 보고 말 한 번 걸어보고 싶어서 '오늘 추천 메뉴가 뭐에요?' 하고 물어본 적 있어요" 하고 나섰다. 그랬는데 예의 알바 남학생이 "전 알바라서 잘 모르구요, 사장님 불러 드릴게요" 하고는 휭하니 돌아서 사장놈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그 다음부터는 뭘 주문하려고 사람을 부르면 알바 남학생 대신 꼬박꼬박 사장놈이 와서 많이 아쉬웠다는 거였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그 아쉬워하는 표정이 재밌어서 나는 "우리 작은딸, 남자 얼굴 보는 여자였어? 아빤 전혀 몰랐네" 하고 깔깔댔다.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오버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정말? 엄마는 전혀 안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하고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뭔가 발칙한 숨은 의도가 있구나 싶어 눈짓으로 물어보니 "전에 내가 우리 작은 따님 남친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그 친구 얼굴 보는 순간 우리 딸이 얼굴 같은 건 전혀 안 따지는구나 생각했죠" 하고 깔깔댔다.


그러자 작은딸은 또 한번 발끈했다. 언니에 이어 아빠 엄마까지 자기를 놀려먹으려 들자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제 엄마 말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님 어머님! 불초소녀 이 작은딸, 남자 얼굴 보는 여자 맞아요" 하고 시크하게 인정하더니만, "단지 저는 엄마가 아빠 고를 때처럼 남자 '얼굴만' 보는게 아니라 외모와 성격, 인생철학 등등 요모조모 골고루 다 보는 게 다를 뿐이죠, 하하" 하고 맞받아쳤다. 잘 생겼단 소리는 결단코 들어본 적 없는 아빠의 얼굴, 못 생긴 남친을 뒀다 놀리는 엄마의 잘 생긴 것관 거리가 먼 남편감 간택을 일타쌍피로 한방에 '멕이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래 그래, 아빠가 좀 못 생기긴 했지. 너네 엄마가 젊은 시절 눈에 콩깎지가 끼는 바람에 미녀와 야수 커플이 탄생했단 얘기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하하" 하고 내가 순순히 자폭하자 작은딸은 좀 미안해진 모양이었다. "아냐, 그래도 내 눈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하고 생전 안 부리던 애교를 다 부린걸 보면 말이다. 그러면서 작은딸은 덧붙여 말했다. "사실 잘 생긴 남자들은 얼굴값 해서 못써. 남자는 그저 아빠처럼 조신~하게 처자식 사랑하고, 자기 할 일 열심히 잘 하는게 최고인 거야"라고. 


씨도둑질은 못한다더니만 걸크러시 김숙에 푹 빠져있는 제 엄마 성격과 말투를 꼭 빼닮아서는 어느덧 작은딸에게서도 뼛 속 깊은 곳으로부터 가모장적 기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얼굴 한번 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여왕벌에게 시달렸을, 그리고 앞으로 계속 시달리게 될 작은딸 남친 녀석에게 왠지 진한 연민과 동지애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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