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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Oct 04. 2021

나를 '부자아빠'로 만들어준 여덟 살 딸

소소잡썰(小笑雜說)

우리집 쌍둥이 딸이 여덟 살 때 일이다. 하루는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자료를 찾고 있는데, 큰딸이 그림일기를 썼다며 내게 들고 왔다. 잘 썼는지 한 번 봐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 그림일기 시작 부분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나는 우리 집만 부자인 줄 알았는데...'라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산층도 될까말까한 게 우리집 형편이건만 난데없이 '부자'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어지는 다음 부분도 내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언니네 집도 부자였다'라 써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네란 아내와 친하게 지내는 동네 친구네를 말하는 건데, 큰딸 목격담인즉 '부자'인 우리 집보다 무려 화장실도 하나가 더 있고 집 크기도 크더라는 것이다.


지방 중소규모 도시에서 20평대 아파트 사는 우리 집이나 30평을 갓 넘는 ○○언니네 아파트라고 해봐야 서울 지역 변두리 아파트 전세값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부자라는 말은 정말 가당치도 않았지만, 어린 딸은 정말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였다.


이같은 큰딸의 믿음이 어디서 비롯된 걸까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 평소 내 언행 때문 아닌가 싶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었고, 그 때문에 학교에 뭔가 돈 낼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공연히 부모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말도 잘 꺼내지 못하곤 했었다.


그런 내 경험에 비춰 나는 우리 딸들에게만은 그런 눈치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우리 딸들이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어 내 눈치를 살피며 "아빠 돈 있어요 없어요?" 하고 물을 때면 "꼭 필요한 것들을 살 정도로는 충분히 돈 있어",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는 않지" 하는 식의 답을 내놓곤 했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했던가? 아빠의 이같은 두루뭉술한 답 중 큰딸은 자기가 듣고 싶은 '우리 아빠는 충분한 돈을 갖고 있고, 부자다'라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접수한 모양이었다. 장난감을 사주건 맛난 것을 사주건 아빠가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인 편이 저에게 유리하다 판단했기 때문일 거다. 그 결과 '우리집은 부자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 거였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묘한 게 현실은 부자 따위완 거리가 멀지만, 큰딸이 그림일기에 그렇게 우리 집을 부자라고, 또 나를 부자아빠라고 쓴 걸 본 순간 나는 실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 봤다. 그 결과 내가 적어도 어린 딸에게만큼은 부자로 비춰지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산층이나 될까말까한 그저 그런 월급쟁이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 딸에게만큼은 부자아빠로 비춰지고 싶었던 모양이고, 내 바람대로 어린 딸 눈에 그렇게 비춰진 게 기분 좋았던 거다. 아빠가 부자라고 믿는 한 제 아빠 성격을 빼닮은 어린 딸은 쓸데없는 걱정없이 자기 또래의 문제와 걱정에만 전념할 수 있을 거기 때문이다.


부자도 아니면서 어린 딸에 등 떠밀려 졸지에 부자아빠가 돼버린 나는 정말로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표현을 빌자면 어린 딸이 나를 '부자아빠'라고 불러주는 순간 나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그의 '부자아빠'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 시의 한 구절을 잠시 떠올려 본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 싯귀를 잠시 빌자면 '오늘 저녁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럭저럭 살 만한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 애들 학원비를 대고도 딸아이가 좋아하는 고기 사줄 돈이 남았'으니 이 정도면 적어도 내 어린 딸 앞에서만큼은 '부자아빠'라고 좀 들이대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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