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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Nov 15. 2021

고무신 한 켤레의 치명적인 유혹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61


우리 아버지 시대인 5~60년대에는 '고무신 선거'라는 말이 있었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 보면 대문 앞에 출마자 홍보물과 함께 슬그머니 고무신 한두 켤레를 놓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데서 비롯된 말이다.


지금이야 고무신 한 켤레 해봐야 3~4천원 밖에 안 하고, 그나마 신는 사람도 거의 없어 별 감흥이나 실감이 안 나지만, 신발을 비롯한 모든 물자가 귀했던 우리 아버지 시대엔 고무신 한 켤레가 표심을 좌우할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귀한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고무신을 직직 땅에 끌고 다니거나 뒷꿈치를 꺾어 신다 들키면, 혹은 친구들과 험한 장난을 치느라 그걸 해지게 만들거나 찢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어머니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힘들게 일한 돈으로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와중에 오래 신으라고 부러 한 칫수 큰 놈으로 사준 새 고무신을 못쓰게 만드는 건 어머니 입장에선 대역죄나 다름없는 큰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난감이 거의 없어 놀거리가 절대 부족했던 어린 우리는 고무신을 갖고 할 수 있는 온갖 놀이들을 개발해 던지고 구부리고 비틀며 난리를 치기 일쑤였다. 그 시절 어린 우리들에게 고무신은 냇물을 만나면 둥둥 떠다니는 배가 됐고, 흙더미를 만나면 흙과 자갈을 실어나르는 덤프트럭이 됐다. 간혹 엿장수의 달콤한 유혹이라도 만나는 날엔 심지어 엿 몇 가락과 바꿔먹는 물물교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게 이렇듯 물건 귀한줄 모르고 천방지축 설쳐대니 가난한 형편에 그 뒷감당을 해야 했던 아버지 어머니는 아마 속 꽤나 시끄러우셨을 거다. 그 틈새시장을 파고 들어온 게 바로 '고무신 선거'였다. 한 근대문화 전문가 말에 따르면 6~70년대 고무신 한 켤레의 체감 가격은 지금 돈으로 5~10만원은 될 거라 하니 아버지들 입장에선 제법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소득수준 향상과 시대 변화로 지금은 고무신 신은 사람을 거의 보기 힘들게 됐지만, 간혹 길을 가다가 고무신 신은 어르신들을 조우하게 되면 그래서 나는 아련한 향수에 젖곤 한다. 고작 고무신 한 켤레에 표심(票心)이 흔들리곤 했던 가난했던 날의 우리 아버지들 모습이 그 위로 오버랩돼 가슴 한 편이 짠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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