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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Nov 22. 2021

아버지들의 사랑은 무쇠가마솥 곰탕을 닮았다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62


어린 시절, TV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다. '허니(Honey)', '달링(Darling)' 하는 꿀물 떨어지는 호칭과 함께 젊은 부부는 물론 나이 지긋한 부부까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듯 포옹이나 입맞춤 같은  일상적으로 해대는  그것이다.


애정 표현이라곤 어쩌다 퇴근길에 군고구마  봉지 사다가 멋대가리 없이 내미는  거의 전부인 아버지를 보며 자란 내게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국 부부들의 거침없는 애정 표현은 적지않은 문화충격이었고, 완전한 신세계였다.


같은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럴까,  그렇게 문화적 차이가 나는 걸 궁금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결과 미국식 자유연애와 한국식 중매결혼이 그같은 차이를 가져온게 아닐까 싶었다. 자유연애가 주류를 이뤄온 미국에서는 결혼이란 힘든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상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적극적인 애정 공세 필수적이었던 반면, 중매결혼이 일반적이었던 과거 우리나라에선 결혼 당일에야 부부가 겨우 얼굴을 마주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과정이 이렇듯 판이하게 다르다 보니 부부 간에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깊이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연애 끝에   오래 같이 있고 싶어 결혼한 부부는 애정이 점점 깊어갈 수밖에 없는 사이였, 생판 모르던  사람이 별다른 선택권 없이 부부로 합쳐진 우리네 부부는 그 시작부터 어색하고 어딘가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니(Honey)', '달링(Darling)' 같은 서구식 꿀 떨어지는 애정 표현을 우리 아버지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나 심리적 배경은 무시한  "한국 남자들은 너무 애정 표현이 인색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아버지들 입장에선 비교선상이 다른 잘못된 비교고, 많이 억울 수밖에 없는 잘못된 비난이다.


장미꽃 한 다발을 곁들여 "자기야, 사랑해!"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지 몰라도 우리 아버지들도 딴엔 열심히 사랑 고백을 해왔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힘들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술 한 잔 걸치고 군고구마나 붕어빵 한 봉지를 들고 오는 게 그런 것들이다. 그 봉지 안에는 '없는 살림에 늘 고생하는데 이거라도 먹고 힘내길 바래', 혹은 '세상살이가 쉽진 않지만 당신 덕분에 힘을 내고 있어. 고마워!'라는 진한 사랑 표현이 담겨 있다.


끓는 물에 스프를 풀어 몇 분만 끓이면 일견하기에 그럴듯한 맛과 색을 이끌내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사랑이 아니라, 잘 끓지도 않는 무쇠 가마솥에  시간, 스무 시간 깊게 우려내 깊고 진한 맛을 내는 곰탕같은 사랑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 아버지들 식의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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