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잡썰

"너넨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

소소잡썰(小笑雜說)

by 글짓는 사진장이

간혹 한 번씩 아내는 "너네는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며 딸들에게 장난인 듯 장난 아닌 장난 같은 질투심을 불태우곤 한다. 아빠인 내게 뭔가 부탁할 일이 생길 때면 딸들이 몸을 배배 꼬며 "아빠, 오늘 날도 추운데 나 학교까지 한번 태워다주면 안 될까?" 하는 식으로 애교를 부릴 때다. "카카오땡 택시 불러서 타고 감 되지 아빠 쉬지도 못하게시리..." 하고 입으론 툴툴거리면서도 어느새 자동차 키를 챙기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아내는 곱지않은 눈초리로 "어휴, 저 딸바보!", "너넨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를 번갈아 외치곤 한다.


코흘리개 시절 엄마를 일찍 여의고, 고등학교 시절엔 아빠까지 여읜 까닭에 아내는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늘 엄마 아빠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해 왔다. 어느날 TV방송에서 한 개그우먼이 자기 딸에게 "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는 얘길 듣고는 "나도 학교 다닐 때 친구들한테 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고 그랬었는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성인이 된 뒤론 누구한테 그런 말 할 기회도 없었는데, 나를 사이에 두고 딸들과 연적(?) 관계로 만나다 보니 다시 아빠의 빈자리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건 걸핏하면 나더러 '딸바보 아빠'라 놀리고 삐지는 아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더 더 더 딸바보'는 바로 자기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젊은 시절엔 "과일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콧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딸들을 키우기 시작한 어느날부턴가는 갑자기 과일을 딱 끊다시피 한 사실 하나만 해도 그랬다. 30여 년 간 이어온 식성과 식습관까지 한 방에 바꿔버리는 기적이 일어난 거다.


문제의 젊은 시절, 아내는 라면 한 그릇도 양이 너무 많다며 반도 채 못 먹은 채 젓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다. 데이트하던 시절만 그랬던 게 아니라 결혼한 이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일 앞에선 이게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싶을 만큼 사람이 확 달라졌다. "맛있다, 맛있어!"를 연발하며 앉은 자리에서 귤 한 박스를 반쯤 비워내는 건 기본이었고, 밥으로 웬만큼 배를 채운 뒤라도 "과일 먹는 배는 원래 따로 있거든" 하며 배탈이 날까 두려울 만큼 먹어치우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다가 쌍둥이 딸을 낳았는데, 누가 제 엄마 딸 아니랄까 봐 딸들도 아기 때부터 과일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아기 주제에 지들이 뭔 맛을 안다고 과일만 봤다 하면 열일 제쳐놓고 그 작은 입으로 냠냠거리며 식탐을 부리기 일쑤였다. 네다섯 살 무렵인가 한 번은 아내가 아파트 이웃주민 초대를 받아 놀러갔다 온 적이 있는데, 돌아오자마자 하는 말이 "남편, 우리 딸들 귤 좀 사줍시다. 내 참 남 부끄러워시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더니 아내 말인즉 "오늘 동네 아줌마들이랑 같이 oo이네 집엘 놀러갔는데, 우리 딸들이 글쎄 손님들 먹으라 내놓은 귤 한 쟁반을 거의 몽땅 게걸스럽게 해치워 버렸어요. 누가 보면 평생 귤 한 번 안 사 먹인줄 알겠어요 정말" 하고 하소연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연신 "어머, 저 쪼그만 것들이 먹는 것 좀 봐" 하고 감탄하며 더 먹으라고 쟁반을 밀어줬는데, 아내는 얼굴이 화끈거려 죽는 줄 알았다는 거다.


이 무렵부터였을 거다. 과일 맛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어린 딸들은 "밥 대신 과일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대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기 시작했고, 그와 반비례해 아내는 그 좋아하던 과일들과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과일을 싫어하게 됐다는 얘긴 아니다. 여전히 과일을 좋아하긴 했지만,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딸들 입으로 들어가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단 얘기다. 내가 아내를 가리켜 '딸바보 아빠보다 더더더 딸바보 엄마'라 말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회사에서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아내가 "밥하기 싫은데 오늘은 우리 딸들 점심으로 초밥 시켜주면 어떨까요?" 하고 카톡을 날려왔다. 생활비가 아닌 남편카드 찬스를 쓰겠다는 얘기였다. 컨디션이 안 좋은 모양이다 생각하며 선선히 그러라고 답했는데, 잠시 후 초밥 2인분을 주문했노라는 추가 카톡이 날라왔다. 아내 역시 초밥을 매우 좋아하는 걸 아는지라 "웬 2인분? 3인분 시켜야지" 하고 물었더니 "난 그냥 밥하고 국에 먹는게 더 좋아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뻥 치시네 ㅋㅋ' 하고 웃었다. 안 봐도 비디오요, 여든 먹은 노인이 얼른 죽어야지 하는 진정성이라곤 1도 없는 빈 넋두리였다. 맛난 밥에 매우 진심인 편인 딸들을 위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비싼 초밥 2인분까진 주문을 했지만, 차마 자기 거까진 주문할 수 없었던 아내 속내가 고스란히 읽혀졌다. 누가 딸바보 엄마 아니랄까 봐 꼭 그렇게 티를 낸다.


맨날 나더러 딸바보 아빠라 핀잔을 주고 째려 보면서 그 좋아하는 과일도 제대로 못 먹고 초밥 1인분 추가주문도 못 하는 아내야말로 진짜진짜 딸바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아내를 위해 나는 가끔 드라마 <도깨비> 대사를 흉내내 "먹고 싶은 거 다 얘기해 봐. 요기서부터 쩌어~기까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하며 아빠 같은 남편이 돼주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내는 해맑은 표정으로 "나 오늘 회 먹고 싶어요!", "나 오늘은 고기 느낌인데 고기 좀 사주세용!" 하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곤 한다. 덕분에 나는 평상시엔 딸 둘, 가끔은 딸 셋을 키우며 산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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