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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Jun 15. 2022

나는 그림자가 제법 잘 생겼다

소소잡썰(小笑雜說)


'어랏 이 시키, 그림자가 제법 잘 생겼네!'

어느 햇살 좋은 날, 사무실 입구로 들어서던 중 내 그림자를 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이목구비는 못 생겼지만, 그걸 가린채 그림자로 보니 제법 봐줄만 하단 생각이 든 거다.


이쯤 얘기하면 대충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난 못 생겼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희대의 어록을 남긴 코미디언 이주일만큼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못 생겼다. 그래서 대학시절, 어쩌다 미팅 자리에 나가게 되면 주로 다른 친구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맡곤 했다.


사회생활 시작 후 얼마 안 됐을 땐 심지어 "그런 얼굴도 대기업 입사가 가능한가 보네요"하는 소리까지 들은 적도 있다. 그 말을 한 상대방은 업무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거래처 직원이었고, 그래서 난 더 충격을 받았었다. 자기 딴엔 "핸디캡을 딛고 성공하셨네요"란 칭찬을 해주고 싶었는진 몰라도 듣는 내 입장에선 그냥 못 생겼단 욕으로 밖엔 안 들렸다. 더 기분 나빴던 건 그런 말을 내뱉은 상대방 역시 나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얼굴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경망스런 주둥이를 가진 사람의 업무 협조 요청은 물론 정중하게 거절 당했다. 하늘에 맹세코 그가 제 처지도 망각한 채 얼토당토 않게 감히 내 <얼평>을 한 것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회사 사정상 들어주기 힘든 요청이었고, 그런 경망스런 주둥이를 가진 사람과는 거래를 안 트는 게 회사에도 이익이라 판단됐을뿐...


어쨌거나 저쨌거나 객관적으로 나는 못 생겼다. 이목구비 중 코 하나만 조금 봐줄만 하고, 나머지는 종합적으로 못 생겼다. 그 사실이 젊은 시절엔 제법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오십대에 접어든 지금은 그냥 조금 아쉬운 정도다. 잘 생긴 놈들이 별다른 노력도 없이 무임승차 격으로 누리는 온갖 것들을 백분지 일도 못 누려본 게 아쉽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대신 나에겐 잘 생긴 놈들이 누리지 못하는 다른 것들이 주어졌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제법 명석한 두뇌라든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적확히 구사할 수 있는 글재주, 비교적 나쁘지 않은 사진가로서의 재능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껍데기만 그럴 듯한 것보다는 사실 이 편이 마라톤 같은 인생살이에선 훨씬 실속있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


게다가 이번엔 그림자가 제법 잘 생겼다는 새로운 장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175cm 키에 70kg 마른 체형 덕분에 그림자가 좀 길게 늘어질 땐 언뜻 모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머리카락 모델, 손 모델 같은 것도 있는 세상이니 이 정도면 그림자 모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잘 생긴 놈들에게도 못 생긴 부분은 있는 것처럼 못 생긴 사람들에게도 잘 생긴 구석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그림자가 제법 생긴 데다가 좌뇌가 잘 생겨 논리적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우뇌 역시 제법 생겨서 예술적 재능도 좀 갖췄다는 게 그것이다. 살아온 경험에 비춰보면 나처럼 못 생긴 사람들 중엔 못 생긴 대신 말재주와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고, 공부하는 머리가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럼 된 거다. <신은 결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는 말마따나 모든 걸 가진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객관적으로, 종합적으로 내 이목구비가 못 생긴 건 다른 잘 생긴 부분들을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내 못 생김 안에는 겉보기만 번드르한 놈들과는 다른 류의 잘 생김이 깃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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