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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우리 아버지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16
by
글짓는 사진장이
Jun 8. 2021
전북 임실쪽 오일장에 갔다가 우리 아버지처럼 6.25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국가유공자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생긴건 달랐지만 어딘가 우리 아버지를 닮은 느낌...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인 나는
8.15 해방 세대이자 6.25 전쟁 세대인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30년 이상 벌어지는 세대 차이에 서로의 가치관마저 크게 다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일상적인 말 몇 마디 외엔 자연스레 대화가 끊겨버렸다.
젊은 시절의 나는 6.25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답답함을 느꼈었다.
6.25에 직접 참전해 총상까지 입으신 아버지는 그런 내가 많이 답답했을 거다.
서로 충돌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결국 정치 얘기 같은 건 최대한 피했었고,
TV 뉴스에서 남북 화해니 장밋빛 통일 전망이 흘러나와도 서로 침묵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소학교도 채 못 마친채 생업전선으로 내몰렸던 아버지는
그로 인해 자칫 잘못했으면 인민군에 끌려갈 뻔 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시곤 했다.
자전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동네 자전거포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중 6.25가 터졌고,
마을로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징병을 위해 애부터 어른까지 마구잡이로 임시수용소에 감금했다.
마침 안면이 있는 동네 형 하나가 임시수용소 인민군 경비대에 있는 걸 보고 아버지는
"요 앞 내가 일하는 자전거포에서 물건 하나만 챙겨오겠다"고 사정한 끝에 탈출해
그 길로 부리나케 국군에 입대를 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분위기로 봐서 잡히면 두 말 필요없는 총살형감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뒤 무슨 고지 전투엔가 참가해 오른쪽 팔 총알 관통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부대원 대다수가 죽고 아버지와 다른 전우 단 두 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스물도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지옥 같은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고
그 와중에 소중한 한 팔마저 불구가 됐으니 이후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아버지 눈으로 보면 비싼 등록금 들여 대학이라고 보내놨더니만
386세대랍시고 천방지축 날뛰는 어린 내가 정말 한심해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온 지옥을 이해하기엔 터무니없이 어렸던 그 무렵의 나는
젊은 세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저 극복하기 힘든 세대 차이라고 치부하고 말았었다.
그러나 나이 50하고도 어느덧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짐작하게 됐다.
내가 절실했듯이 아버지 또한 그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당신의 시대를 살아오셨고
비록 가치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버지가 지켜오신 그 터전 위에,
끊길듯 면면히 이어져 온 그 길 위 어디쯤에 내가, 우리가 서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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