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면도칼을 닮은 우리 아버지들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19

by 글짓는 사진장이


아버지들이 즐겨찾는 이발소에 가면 미용실에선 보기 힘든 예리한 면도칼이

시퍼렇게 칼날을 번뜩이며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눈에 띄곤 한다.

기원전 1600년 경부터 이발사들이 외과의사 역할을 해온 유구한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날카롭고 예리한 칼이다.


이발이 끝나고 나면 대개 이발사들은 이 녀석을 가죽 혁대 같은 데다가 썩썩 간 뒤

무질서하게 자라난 아버지들 수염과 잔털을 향해 사정없이 날리곤 한다.

칼날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피부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그래서 이발사가 면도칼을 들고 있는 동안만큼은 천하 없는 건달일지라도

함부로 까불어선(?) 안 된다는 금언이 그 바닥에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었다.


시대 변화와 함께 아버지들이 본의 아니게 미용실로 내몰리게 되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날카로운 면도칼이었다.

미용실의 무딘 칼날이나 전동식 기구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서늘할 정도로 시원하게 쓸고 지나가는 날 선 감촉이 그리운 거다.


수십 년 세월 동안 가죽 혁대에 쓸리고 갈려서 뭉툭하고 못 생겨진,

하지만 그 어떤 잘 생긴 놈들보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오래된 면도칼을 보노라면

문득 우리네 아버지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족들을 위해 수십 년 세월 동안 세상이라는 가죽 혁대에 쓸리고 갈리느라

늠름하고 날카롭던 청년에서 힘 빠지고 뭉특한 늙은이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세상 어느 것보다 잘 벼뤄진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계신 아버지 당신들과

꼭 닮은꼴이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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