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아내는 옆자리에서 연신 "배불러"를 연호했다. 본인 물냉면에다가 내 비빔냉면까지 욕심내 뺏어먹더라니 양이 좀 과했던 모양이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도 우리집에서 대략 한 시간은 가야 하는 단골 냉면집. 냉면에 매우 진심인 아내는 이 집 냉면을 정말로 좋아한다. 우리 동네 잘 한다는 냉면집을 여러 곳 데려갔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냉면집들도 두루 섭렵했지만, 아내의 최종선택은 "역시 그집이 제일 나아"였다.
아내는 내 글쓰기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자신이 저지른 만행(?)들을 적나라하게 까발겨도 잠깐 발끈할뿐 이내 용서하곤 한다. 아마도 내 글쓰기에 방해가 되는 걸 삼가하고 싶은 듯하다.
그런 아내가 유일하게 태클을 거는 글쓰기 소재가 하나 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예의 냉면집이다. '나의 냉면집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같은 심리다. 지금도 점심시간이면 대기번호표를 받아야 하는 판인데, 더 사람들이 몰리면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내가 글 써봐야 몇십 명 보는 게 고작인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이라 항변했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다. 앞서 무심코 내가 소개한 맛집 하나가 수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난리가 난 적이 있어서다. 사진 한 장과 함께 소개한 한 전통엿 농가는 그후 TV 전파만 몇번을 타며 유명세를 톡톡히 치루기도 했다. 인터넷 바닥이란 원래 그런 거라 어느 구름에서 소나기가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배불러 죽겠다는 아내를 데리고 꽃이 만개 중인 광양 매화마을과 구례 산수유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만보계를 보니 1만2000보 넘게 걸었다. 어쩐지 다리가 뻐근하더라니 모처럼 하루 휴가낸 걸 알차게 즐기겠단 욕심에 많이도 싸돌아 다녔다 싶다.
이때 문득 '이 정도 돌아다녔으면 이제 소화가 다 됐겠지' 하는 생각이 들며 나는 슬며시 장난기가 동했다. 마침 돌아가는 길에 문제의 냉면집이 있다는 걸 떠올린 거다. 시간도 막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우리 지나는 길에 당신 좋아하는 냉면이나 한 그릇씩 더 먹고 갈까?" 하고 장난스레 아내에게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내는 펄쩍 뛰었다. "미쳤어요?"라며 말이다. 몇 개월의 휴무 끝에 문제의 냉면집이 다시 문을 연 첫날,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오픈런을 한데 이어 일주일만에 또 갔더니 사장님이 "자주 오시네요" 하고 인사를 했었던 까닭이다. 저녁 먹으러 또 갔다간 냉면집 사장님한테 '저 양반들 우리집 냉면에 제대로 미쳤구만' 하는 눈도장을 찍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예의 냉면집 있는 동네를 지나쳐 거의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문득 말했다. "남편, 솔직히 나 아까 잠깐 망설였어요. 귀가 솔깃하더라구. 나 미쳤나 봐 ㅎㅎ" 하고 말이다. 수줍은 사랑고백이라도 하는 어투였다. 나는 그냥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이쯤 되면 정말 못 말리는 아내의 냉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