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통해 틈틈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를 보면서 요즘 나는 느끼는게 참 많다. 감기나 몸살 바이러스처럼 정신질환 바이러스란 녀석도 사람이 조금만 약한 틈을 보이면 누구에게나 쉽게 깃들 수 있다는 것, 멀쩡하게 사회생활 잘 하던 사람도 어느날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큰 충격을 받으면 정신질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런 것들이다.
악성민원에 시달리던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대전 초등학교 교사 남편이 최근 "엄마가 나약해서 매정한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엄마는 열심히 살았는데 재난에 의해서 하늘나라로 간 거라고 아이들한테 말해주고 싶어요"라고 인터뷰한 걸 보면서도 나는 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를 떠올렸다.
보다 정확히는 이 드라마에서 간호사로 등장하는 정다은(박보영 분) 쌤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밝은 성격으로 아픈 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그녀가 그 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에 사로잡히는 모습이 몇 달 전 극단적 선택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대전 교사와 오버랩돼서다.
극중 정다은 간호사 쌤은 성격도 밝은 데다가 자신의 일과 맡은 환자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맡았던 환자 한 명이 극단적 선택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사건이 벌어지자 '내 잘못이 아니었을까?' 하는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심한 우울증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대전 초등학교 교사도 분명 책임감 강하고 그 누구보다 자기 반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었을 거다. 20여년 경력이면 산전수전 다 겪어봤을 터라 문제아를 외면하거나 피해가면 자기 한몸 편할 거란 걸 익히 잘 알았을텐데, 굳이 알은 척 하며 열심히 지도를 하려 했던 사실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자기 일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대전 초등학교 교사도 그렇고 드라마 속 정다은 간호사 쌤도 그렇고 조금만 덜 책임감 있게 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무책임한 생각을 해봤다. 손가락질은 좀 받을지언정 조금만 무책임하게 살았으면 굳이 학생이나 환자 문제로 상처 받을 일도 없었을 거고, 본인 실속이나 챙겨가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했으면' 하는 가정법처럼 세상 부질없는 짓도 없음은 잘 알지만 말이다.
사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침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건 대전 초등학교 교사 사망 백일을 앞두고 모 언론과 나눈 인터뷰 속 가족들 심정이 문득 내 마음을 울려서다. 특히 남편 분은 "아내 없이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있다"며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현실을 회피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말했다는데, 이 말이 나로 하여금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소환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해당 드라마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오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그를 만나러 갔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공무원 되라고 등을 떠밀지만 않았어도 우리 아이가 그런 극단적 선택까지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식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허망하게 잃고 나면 이렇듯 남은 주변 사람들은 본인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단 얘기다.
나 역시 몇 년 전 아버지가 말기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뒤 적잖은 시간 동안 그런 류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앓았었다. '내가 좀 더 자주 아버지를 찾아뵈었더라면 조기에 암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노인네가 고집을 부리건 말건 처음부터 서울 큰병원으로 모셔서 수술이 됐건 뭐가 됐건 치료를 받게 만들었다면 좀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식이었다. 이미 버스는 떠난지 오랜데 나는 그 뒷꽁무니에 대고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던 거다.
칼로 무 자르듯 사람 마음이란 게 댕겅 잘라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남겨진 유족들이 부디 조금만 자책하고 조금만 죄책감에 시달렸으면 좋겠다. 극단적 선택이 됐건 말기암이 됐건 본인 아닌 주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대다수의 우리는 이미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미처 다하지 못한 일 같은 거에 매달려 회한과 번민에 휩싸여 사는게 아니다. 지금 현재 시점에서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으로 열심히 잘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분들 역시 우리를 사랑하는 바에야 그분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분명 우리의 눈물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잘 살아가는 모습일 거고, 가끔은 다시 건강하게 웃는 걸테니까.
"아프지 말자"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만 아팠으면 좋겠다. 책임감과 죄책감이란 녀석이 우리 마음과 몸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