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
“이 프로젝트는 안 됩니다.”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사무실. 회의실.
나는 그를 봤다.
“왜요?”
“디자인이 너무 보수적이에요. 젊은 건축가상 받으신 분 맞나요?”
나는 준서다.
건축가.
서른아홉.
한때 젊은 건축가상을 받았다.
한때.
그날 이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혼자.
직원은 나갔다.
“오늘은 일찍 가도 될까요?”
“그래.”
나는 허락했다.
어차피 일도 없는데.
*컴퓨터 화면을 봤다.
포트폴리오.
과거의 작업들.
5년 전.
젊은 건축가상 받았을 때.
주목받았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다음 세대를 이끌 건축가”
“혁신적인 디자인”
그런 말들.
나는 그때가 좋았다.
스포트라이트 받는 게.
시상식.
5년 전.
나는 무대에 올라갔다.
트로피를 받았다.
사진을 찍었다.
객석을 봤다.
아라가 있었다.
5미터 앞에.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해되니까.
이건 나만의 순간이었다.
아라는 그냥 여자친구였다.
편하게 만나는.
섹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기자들이 물었다.
“여자친구 왔나요?”
“아니요. 바빠서 못 왔어요.”
나는 거짓말했다.
쉽게.
아라는 5미터 앞에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누군가와 관계 맺고 있다는 걸.
나는 혼자였다.
혼자여야 했다.
성공한 건축가는.
그날 밤.
아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준서야.”
“응.”
“나 거기 있었어.”
“알아.”
“왜 없다고 했어?”
침묵.
“바빴어. 정신없었어.”
“거짓말. 나 똑똑히 봤어. 날 보고도.”
아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네 여자친구야. 6개월 만났어. 근데 왜 없다고 해?”
“아라야.”
나는 짜증이 났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나 상 받았어. 좀 축하해줘.”
“축하해. 근데 나는?”
“너는 뭐?”
“나는 뭐야? 네 여자친구 아니야?”
“여자친구지.”
“그럼 왜 없다고 해?”
“그냥…”
나는 말했다.
“복잡해지니까.”
2주 후.
아라가 말했다.
“준서야. 나 임신한 것 같아.”
나는 멈췄다.
“뭐?”
“테스트기에 두 줄.”
“확실해?”
“응.”
침묵이 흘렀다.
“어떡할래?”
아라가 물었다.
나는 패닉이 왔다.
“아라야.”
“응.”
“사람들이 알면 어떡해.”
“뭐?”
“지금 한창 뜰 때인데. 이미지가 중요해.”
나는 말했다.
“임신했다는 거, 결혼한다는 거, 알려지면…”
“알려지면 뭐?”
아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쁜 거야? 네 여자친구 임신한 게?”
“나쁘진 않지. 근데…”
“근데?”
“복잡해져.”
결국 나는 결혼했다.
아라 부모님이 압박했다.
“책임져야지.”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결혼했다.
하지만 조건을 걸었다.
“결혼 기사 내지 마.”
“왜?”
아라가 물었다.
“사생활이잖아. 굳이 알려야 해?”
“다들 내는데.”
“나는 싫어.”
나는 확고했다.
“이미지 관리 해야 돼. 자유로운 건축가. 젊은. 그게 내 브랜드야.”
“나랑 결혼하면 그 이미지 깨져?”
“아니. 근데…”
“알겠어.”
아라가 포기했다.
“안 낼게.”
하지만 아라 부모님이 냈다.
결혼 기사.
“젊은 건축가 ○○○, 번역가와 결혼”
나는 화가 났다.
“왜 냈어?”
“부모님이 내셨어.”
아라가 말했다.
“미안해.”
“취소시켜.”
“이미 났어. 어떻게 취소해.”
나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이제 모두가 알았으니까.
내가 결혼했다는 걸.
자유롭지 않다는 걸.
매거진 촬영.
결혼 후 한 달.
아라가 임신 중이었다.
“커플 화보 찍으시죠?”
편집자가 말했다.
“신혼부부니까.”
나는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기사 났으니.
“알겠습니다.”
촬영했다.
아라와 나.
손을 잡고.
웃으며.
하지만 나는 불편했다.
내내.
카메라가 나를 찍는 게 아니라,
우리를 찍는 게 싫었다.
나는 혼자여야 했는데.
아이가 태어났다.
아라는 말했다.
“이제 달라지겠지?”
“뭐가?”
“우리.”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안 바뀔 거니까.
*나는 여전히 아라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변했다.
아니.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이 변했다.
“다음 세대를 이끌 건축가”에서
“한때 젊은 건축가상 받은”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젝트는 줄었다.
클라이언트들은 말했다.
“예전만큼은 아니네요.”
“보수적이에요.”
“신선함이 없어요.”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젊은 건축가상 받은.
주목받는.
혁신적인.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이미 다음 세대가 왔다.
나보다 젊은.
나보다 참신한.
나는 이제 과거였다.
집에 들어갔다.
아라가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왔어.”
“응.”
“저녁은?”
“먹었어.”
나는 서재로 갔다.
문을 닫았다.
컴퓨터를 켰다.
포트폴리오를 봤다.
5년 전.
상 받을 때.
인터뷰하던 때.
주목받던 때.
나는 그때가 좋았다.
아라가 문을 두드렸다.
“준서야.”
“응.”
“얘기 좀 할까?”
“바빠.”
“뭐가 바빠?”
“작업.”
“요즘 프로젝트 없잖아.”
아라의 목소리.
나는 짜증이 났다.
“그게 네가 알 바야?”
“나 네 아내야.”
“알아.”
“그럼 좀 얘기해줘. 요즘 힘들어 보여.”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라야.”
나는 문을 열었다.
아라를 봤다.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만 좀 물어봐.”
아라의 표정.
상처받은.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더 힘드니까.
왜 아라는 그걸 모를까.
나는 몰락하고 있는데.
젊은 건축가에서 과거의 건축가로.*
문을 닫았다.
핸드폰을 봤다.
인스타그램.
아라 계정.
최근 올린 사진.
아이 생일 파티.
우리 가족 사진.
나는 그 사진을 봤다.
어색한 웃음.
억지로 어깨에 올린 손.
댓글들.
“행복해 보여요.”
“건축가 남편 부러워요.”
건축가 남편.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적어도 사람들은 아직 나를 기억하니까.
건축가로.
아라 덕분에.
나는 생각했다.
아라와 이혼하면?
그럼 나는 뭐지.
“한때 젊은 건축가상 받았던, 이혼한, 실패한 건축가”
아니.
차라리 지금이 낫다.
“건축가의 남편”이 아니라
“건축가”로 불리는 것.
아라 덕분에.
아라가 SNS에 올리는 사진들.
“건축가 남편”이라는 캡션.
그게 나를 살려준다.
적어도 타이틀은.
그래서 나는 계속 있을 것이다.
이 관계에.
끝났지만.
아라를 사랑하지 않지만.
왜냐하면 아라가 필요하니까.
내 정체성을 위해.
아라는 “건축가의 아내”가 필요하고,
나는 “아내가 있는 건축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한다.
사랑이 아니라.
타이틀을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운다.
아라가 달랜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아이는 계속 운다.
아라의 목소리가 지쳐간다.
“제발. 자자. 응?”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건축가다.
아빠가 아니라.
다음 날.
클라이언트 미팅.
“이번 프로젝트는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거절이었다.
나는 알았다.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
젊은 건축가상 받은 사람을.
5년 전의 사람을.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웠다.
핸드폰을 봤다.
아라에게서 문자.
“아이 열 나.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나는 답장했다.
“알았어. 나 미팅 중.”
“언제 와?”
“늦을 것 같아.”
읽음 표시.
답장은 없었다.
나는 카페로 갔다.
혼자.
커피를 마셨다.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젊은 건축가들.
포트폴리오를 들고.
희망에 찬 얼굴로.
예전의 나.
나는 그들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희도 5년 후엔 나처럼 될 거야.
과거가 될 거야.
주목받지 못하게 될 거야.
집에 늦게 들어갔다.
열한 시.
아라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내가 물었다.
“잤어. 병원 다녀왔어.”
“심해?”
“감기래. 약 먹였어.”
“그래.”
나는 서재로 가려고 했다.
“준서야.”
아라가 불렀다.
“응.”
“우리 얘기 좀 하자.”
“피곤해.”
“나도 피곤해. 근데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멈췄다.
“뭐?”
“우리 언제까지 이럴 거야?”
“뭘?”
“이렇게. 같은 집에 살지만 남남처럼.”
나는 아라를 봤다.
“그럼 어쩌자고?”
“이혼할래?”
침묵이 흘렀다.
“싫어.”
내가 말했다.
“왜?”
“이혼하면 나는 뭐가 돼?”
“자유로워지지.”
“자유?”
나는 웃었다.
“자유로워봤자 뭐해. 프로젝트도 없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나는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나 ‘건축가’잖아. 네 덕분에. 네가 SNS에 올리는 사진 덕분에.”
아라는 나를 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이잖아.”
나는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나한테 남은 게 뭐야. ‘젊은 건축가상 받은 사람’. 그것밖에 없어. 근데 그것도 5년 전 일이야.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 필요해. 네가. ‘건축가의 아내’로 SNS에 올리는 너.”
아라는 웃었다.
쓴웃음.
“나도 그래.”
“뭐?”
“나도 필요해. 너. ‘건축가 남편’.”
아라가 말했다.
“우리 똑같아. 서로 이용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끝난 관계.
하지만 끝낼 수 없는.
왜냐하면 서로가 필요하니까.
사랑이 아니라.
타이틀이.
“그럼 계속 이렇게 살래?”
아라가 물었다.
“응.”
나는 대답했다.
“다른 방법 있어?”
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없었으니까.
다른 방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