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솜에게
이번에도 밤 열차를 타서, 탑승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어. 그런데 해가 길어졌는지 잠들려고 할 때쯤 해가 뜨더라. 더 자고 싶은데… 밝아지는 바깥 풍경에 사람들이 일어나서 떠들기 시작했어. 한국에서 가져온 안대와 귀마개가 아니었다면 선잠도 못 잤을 거야. 일어나 보니 1층에 있던 너가 침대 시트로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더라. 아주 똑똑해. 나는 네가 왜 부스럭거리나 했어. 이번 자리는 복도라서 1층이 불편했겠어. 오늘 밤에 내가 1층에서 잘 때도 커튼 만들어줘!!
고요했던 저번 열차와는 달리 이번열차는 꽤나 소란스러워.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는 남자들도 많아. 이게 원래 횡단열차의 흔한 분위기인 걸까? 우리가 탔던 열차가 평화로웠나 봐. 웃통을 벗고 다니는 남자 무리들이 꽤 무섭게 생겼는데, 꼬마소년 한 명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둘이 뭐 하는 사람들일까 상상했는데, 다 틀렸어. 레슬러래. 그래서 울그락 불그락했구나. 첫 열차에서 만난 ‘현대무용 소녀들’처럼 ‘레슬러’들도 대회를 끝내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어. 물론 두 단체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지만… 아무튼 신기하다. 레슬링 선수들을 눈앞에서 본건 처음이야.
이번 열차엔 우리 말고도 한국 사람이 있어. 바로 우리 옆자리 남자분이지. 사실 저번 열차에서도 한국여자 3명을 만났지만, 아주 먼 칸에 타고 있어서 한번 본 게 다야. 그런데 지금 우리 옆자리에 한국사람이 있다니! 너무 신기해. 이 분은 나영석 피디와 박성웅 배우를 동시에 닮은 듯해. 지금부터 편의를 위해 나웅씨라고 할게. 나웅씨는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서 반가우셨는지 발화량이 엄청났어. 흥미로웠지만, 3시간 넘게 듣고 있으니 힘들더라. 나웅씨의 말이 줄어들 때를 노려, 우리는 침대로 도망가 낮잠을 잤지.
잠에 들기 전에 나웅씨가 한 말들을 되짚어 봤어. 올해 나웅씨의 목표는 한달에 한번씩 다른 나라에 가는 거래. 한 번에 세계일주를 하는 건 아니고, 1달 정도 여행하고 다시 한국 와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방식이야. 그리고 숙소는 대부분 당일에 예매하신대. 계획형인 나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겁쟁이이자 효율러라서 여행 가기 전에 시물레이션을 돌려봐야 속이 편하거든… 내가 갈 곳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을 좋아해.
졸업 후에 바로 취업하지 않고 그런 도전을 한다는 게 멋졌어. 진짜 자신의 삶을 사는 느낌이랄까? 그분이 우리보다 딱 4살 많네. 나는 4년 뒤에 뭘 하고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을까? 아님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너는 뭘 하고 있을까? 그때의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할까?
가장 부러웠던 것은 나웅씨가 어제 탔던 횡단열차야. 나웅씨는 미대를 졸업해서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이게 아주 인싸 스킬이야. 그림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으니까. 저번 열차에서 러시아 군인들을 만났는데, 아이패드로 한 명의 얼굴을 그려주기 시작하니까 엄청 긴 줄을 섰다고 하더라고. 한 군인 친구와는 다음 달에 일본여행을 가기로 했대. 내가 꿈꾸던 횡단열차 여행을 이 분이 하고 계셨네. 우리 바로 뒤에 오던 열차가 그런 곳이었다니… 다음 열차를 예매할걸 아주 잠깐 후회했어. 아니야.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좋지만 고요하게 보낸 우리 둘만의 횡단열차가 더 특별한 것 같아. 온전히 횡단열차의 풍경과 평화로운 일상을 즐긴 것 같거든.
2일 뒤에 모스크바에 도착해. 모스크바는 어떤 도시일까? 그곳에서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어디 있을지 예상하는 것보다 그곳에서 행복할지 예상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 행복하다는 감정은 참 주관적인 것인데. 모순적이다. 그렇지? 내가 생각보다 외부자극에 영향을 많이 받나 봐. 너는 어떠니? 내가 본 너는 외부요소에 덜 민감한 것 같아. 나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4년 뒤의 나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