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솜에게
아무리 자도 밤이 오지 않는 기분이야. 해가 뜨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일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자꾸만 시간이 빨라져. 이동, 수면, 식사를 하면서 시간도 번 것 같아 기분이 좋아.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시간 개념이란 게 없어진 것 같아.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옆에 사람이 먹는 음식냄새에 다시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고, 정차역에 잠깐 내려 그 곳에서만 사먹을 수 있는 빵과 주전부리를 사먹고. 그러다 심심하면 너는 책을 읽고. 나는 일기를 쓰고. 졸리면 낮잠 좀 자다가 예쁜 풍경이 나오면 다시 일어나서 사진을 찍어. 그리고 자기 전에는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지.
내일 아침이면 모스크바에 도착을 해서 그런가. 우리 둘 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진을 찍었어. 누구랄 것 없이. 근데 오늘은 너는 좀 과했어. 포토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또 다른 포토박, 박솜! 오늘 너는 정말 창문에 붙은 글라스데코였어. 건너편에 앉은 러시아 언니들이 우리를 보고 ‘왜 저렇게 사진을 많이 찍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3시간 내내 창문에 붙어서 왼손엔 핸드폰 오른손엔 카메라... 다시 생각해도 징글징글해. 근데 어쩌겠어 이게 우린 걸.
기억나? 우리 중학생 때 같이 출사 갔던 거?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 끝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시간이 넘쳐나던 겨울에, 단축수업을 하거나 주말이 되면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 이곳저곳을 누볐잖아. 남산골 한옥마을, 덕수궁, 홍제동 개미마을 등.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서울을 꼼꼼하게 살펴본 때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때도 같이 여행을 했네. 중학생이던 우리가 가장 멀리 갈 수 있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 했던 곳들이었지. 그렇게 8년 뒤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아주 먼 도시들을 지나치고 있어. 솜아! 우리 정말 많이 컸다. 그때의 우리는 몰랐을 거야. 어른이 된 우리가 이렇게나 멋진 여행을 하고 있을지.
24살의 박솜은 여전히 16살 때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간직하고 있어. 그리고 너는 그 눈으로 꾸준히 사진을 찍어왔어. 대학교에 가서 사진동아리활동까지 한 너와는 다르게, 사진에 대한 나의 열정은 너와 친구가 되었던 중학교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피크를 찍고 요즘은 일반인 수준이 되었어. 그런데 오랜만에 너와 여행하니까 그게 아니었나봐. 오늘은 나도 8년 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아. 한겨울에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면서 1500장 넘게 찍던 그때로. 앞으로도 나는 네가 34살, 44살이 되어도 너의 눈으로 찾아낸 아름다운 세상을 계속 기록해주었으면 해. 나는 정말 너의 사진을 좋아하거든.
내일이면 횡단열차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데, 살짝 두렵기도 해. 횡단열차안의 생활이 그새 익숙해져 버렸거든. 어제까지는 갑갑한 열차에서 벗어나 편안한 숙소에서 잘 생각에 행복했는데, 지금은 막상 이 게으른 생활들을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싶어서 아쉬운 마음이 커. 우리의 횡단열차가 조금은 지연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