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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30. 2024

이거 꿈인가?

모스크바

솜에게

 솜아! 우리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어! 횡단열차 안에서만 꼬박 7일 있었네. 우리 이제 잘 씻을 수 있겠다! 우리 두 번째 열차에서는 노하우가 생겨서 세면대에서 머리도 감고, 밥도 더 잘 챙겨 먹은 것 같아. 내 오랜 버킷리스트를 같이 이뤄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혼자 많이 쓸쓸했을 거야. 모스크바역에서 열차 사람들이랑 작별인사하고 사진 찍으니까 엄청 뿌듯한 거 있지? 미션 성공! 우와와악! 이런 기분이었어.


 횡단열차 이웃들과 나눈 작별인사도 기억에 남지만, 나는 우리가 숙소를 찾아갔던 길도 기억에 남아. 30도가 넘는데도 버스 안에 에어컨이 안 나와서 겨터파크 터졌잖아. 그래도 다행인지건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와서 겨드랑이에 땀난 거 티 안나더라. 비 오니까 덥지도 않았어. 너도 귀찮았는지 캐리어에서 우산을 꺼내려는 생각도 안 하고 우리 둘 다 말없이 캐리어만 끌고 가는 게 웃겼어. 한 정거장이나 더 가서 내리는 바람에 비 맞으면서 캐리어 끌고 가니까 정말 힘들더라. 숙소에 다 와갈 때쯤엔 우리 둘 다 반쯤 미쳐서 아무 말 없이 웃던 거 아직도 기억나. 학학학하하하하하하. 역시 힘들 때는 웃어버려야 해. 미쳐버리면 행복하다는 말이 이런 걸까? 나 뭔가 이 장면 죽을 때까지 기억날 것 같아. 앞으로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이 기억을 꺼내면 덜 힘들 것 같기도 해.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호스텔! 아직 체크인 전이라서 우리는 프런트에 짐만 맡기 바로 식당으로 향했지. 너보다 러시아 여행을 2번 더해본 선배로써 진짜 러시아음식을 먹이고 싶었는데 숙소 옆에 한국의 김밥천국 같은 '무무'가 있더라고! 3년 전에 야쿠츠크 갔을 때 러시아 친구들이 카페테리아처럼 먹고 싶은 메뉴를 담는 식당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먹은 보르쉬(러시아 전통수프)랑 감자요리가 맛있었거든. '무무'의 인테리어와 식당이 그때 갔던 식당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너에게 가자고 했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식당이 '무무' 야쿠츠크점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중에 친구한테 물어봐야지.


 네가 싹싹 잘 긁어먹는 걸 보니 흐뭇하더라! 우리 모스크바 떠나기 전에 또 가자! 나는 러시아 음식이 덜 짜서 좋은 것 같아. 우리 완전히 러시아 입맛인가 봐. 밀양박 씨 말고 모스크바 박 씨하자. 러시아 와서 살쪘어. 감자 때문인 것 같아. 역시 감자는 추운 나라가 최고야. 아 그리고 나는 러시아여행 오면 당근김치? 당근라페라고 하나? 그거 꼭 먹는데,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편식이라곤 모르는 녀석.  아 그리고 그거 알아? '비트'가 그렇게 변비에 좋대. 우리 오늘 '보르쉬'랑 '비트샐러드' 많이 먹었으니까 내일 변기 막히겠다.


 횡단열차를 타고 오면서 천천히 시차적응을 했는데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나 봐. 아아 수혈이 시급해. 며칠 전에 간 이르쿠츠크에서 스타벅스는 상상도 못 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반갑다. 역시 수도는 다르다. 스타벅스도 있고.  스타벅스는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정말 많더라. 우리가 카페에서 헛소리 좀 주고받다가 체크인 시간 맞춰서 호스텔로 돌아갔지? 사실 이때 배부르고 졸렸는지 기억이 잘 안나. 짐정리하고 샤워하니까 나가기 너무 귀찮더라. 이틀 뒤에 모스크바를 떠나는 짧은 일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백 퍼센트 침대에서 잠들었을 거야. 그랬다면 후회했겠지? 사실 우리 여행은 이때부터가 진짜였잖아.


 지금까지 갔던 러시아의 도시는 빛이 바랜 파스텔 위로 시간이 바래버린 구소련의 모습이었다면, 모스크바는 빛이 바래지 않은 당시 구소련의 색 위에 led 조명을 촘촘하게 꽂은 것 같았어.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라 그런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느낌이더라. 화려하며 웅장하고 깔끔했어. 건축을 전공했지만 도시계획은 잘 몰라서 내 감상만 말하게 되네. 너한테 뭐라도 설명해주고 싶은데. 러시아 건축은 현대건축에서 주류가 아니라 나도 잘 몰라. 다른 나라 가면 더 많이 말해보도록 노력할게!

 우리가 걸은 모스크바 거리는 모두 예쁘고 웅장 했지만, 굼백화점이랑 붉은 광장은 정말 꿈같았어. 원래는 굼백화점에 들어가려 했는데 밖이 너무 예뻐서 안 들어가고, 우리 둘 다 사진만 찍던 거 너무 웃겨. 굼백화점 뒤편에 달린 크리스털 조명에 아주 혼을 빼앗겨 버렸잖아. 조명이 라푼젤색이라서 그런가 디즈니 공주가 된 기분이더라. 나 혼자였으면 이렇게까지 행복하진 못 했을 거야. 역시 좋은 건 같이 봐야 더 좋나 봐. 아 근데 우리 거기서 사진 찍다가 너 눈에 초파리 들어간 거 어이없고 웃겼어. 가만히 서 있는데 초파리도 돌진하고... 아무래도 모스크바가 널 사랑하나 봐.


 해가 사라진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붉은 광장으로 넘어갔어. 조명이 들어온 붉은 광장은 굼백화점이랑은 또 다른 동화더라. 화려한 모습의 붉은 광장에 다시 넋을 잃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은 것 같아. 이거 꿈인가? 숙소 돌아가는 길에서도 셔터를 누르느라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이나 걸려서 도착지. 처음 와보는 도시라서 밤거리가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야경이 너무 예뻐서 정신없이 돌아다닌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옆에 있어서 무섭지 않았어. 한 명만 사진에 진심이면 이렇게 재밌게 여행하기 힘든데, 우리는 사진에 미치는 타이밍도 같은 것 같아. 나와 함께 여행을 와줘서 고마워 솜아.


p.s 호스텔 도착해서 끓여 먹은 불닭볶음면까지 완벽한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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