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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31. 2024

나 여기 살고 싶어

모스크바

초초에게

 길었지만 따뜻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2차가 끝나고, 드디어 모스크바야. 횡단열차의 마지막에 주황 청년이랑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우리에게 많은 정을 주셨던 분들과 깊게 포옹하며 횡단열차를 마무리했어. 짧지만은 않았던 시간 동안 우리 참 고생 많았다. 모스크바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지만 밤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의 고난을 모두 씻어주었어. 나는 참 이 아름다운 도시가 좋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 애국자가 돼. 한국의 편리함이 그리워서, 익숙해서. 그래서 나는 여행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적 없었어. 근데 모스크바에서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오늘의 모스크바가 영화 같았거든. 그 영화 속에서 주인공으로,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쯤으로라도 살고 싶어. 말도 안 되는 풍경이 자꾸만 우리 눈앞에 나타났잖아. 굼백화점 앞에 화려하게 걸려있는 조명들과 늦게까지 해가 지지 않아 오래도록 핑크 빛으로 물든 붉은 광장의 야경. 발걸음을 떼기가 아쉬웠어. 일상을 살다가도 이런 풍경을 마주하면 모든 걱정이 씻겨 내릴 것만 같아. 이 도시가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진작 와볼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네 덕이야. 너의 버킷리스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가 없었다면 내가 러시아에 발걸음 할 일이 없었을 거야.

 지금까지 느꼈던 추위와 달리 모스크바는 찜통더위로 우리를 반겼어. 지하철 타고 가라고 안내했던 주황청년을 거절하고 버스를 탔던 게 잘못 이었을까? 엄청난 교통 체증에 갇혀 버렸잖아. 거기에 더위에 정신을 못 차렸는지 버스 정류장도 지나쳐서 더 먼 길 걷고. 어쨌든 그 모든 고난을 우리 둘이 헤쳐나가며 더위에 지쳤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폭우 아래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을 수 있었어. 우산도 안 꺼내고 무거운 짐덩이(캐리어보다 짐덩이가 맞는 표현 같아. 곱게 안 보여) 옮기며 깔깔 웃던 순간이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 같아. 잘못된 길이 잘못된 결과만 주진 않는다는 거, 그러니 어떤 길로 가도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들이 있나 봐.


 숙소 도착하니까 그렇게 안도감이 들더라. 편히 머물 공간이 생겨서 그랬나? 짐덩이를 내려놓을 수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체크인 시간이 안되어서 짐만 맡기고 나와야 해서 조금 아쉬웠어. 우리 둘 다 떡진 머리에 남루한 행색으로 무무에 갔잖아. 그 밥이 얼마나 맛있었냐면 횡단열차에서 먹은 감자퓌레만큼 맛있었어. 내가 감자퓌레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특히 보르쉬!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도 만들어먹고 싶을 정도야. 뜨끈하게 그동안의 힘듦을 내려주는 느낌. 물가도 싸고, 음식도 신선한 데다가 입맛에 너무 잘 맞아. 러시아에 살고 싶은 이유에 음식도 한몫했어.


 횡단열차를 타고 많은 걸 얻었다고 했지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야. 이르쿠츠크 호스텔에서도 그랬지만 물 맞는 그 순간이 어찌나 좋던지, 물의 온도와 질감까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야. 이거뿐 일까, 체크인 시간 기다리면서 스타벅스 갔던 거 기억해? 스타벅스 발견한 것부터 뛸 듯이 기뻤고,  거의 일주일 만에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큼 좋았어. 사실 둘 다 한국에서 우리한테 너무 일상적인 거잖아. 오히려 씻기 귀찮다고 미적거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는 일상 그 자체라서 아무런 생각조차 없고.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에 마시는 음료기도 하잖아. 밤샘 과제를 해야 할 때라던가, 출근할 때 마시는 부스터라던가. 근데 그런 소소한 것들이 생경했던 하루였어. 앞으로 일상에서 문득 이 순간을 떠올릴 일이 많을 것 같아. 매일 씻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매일 마시니까.

 일상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만 본 게 아니었어. 너무나 비일상적인 순간들도 많았어. 모스크바의 야경은 내가 본 어떤 곳의 야경보다 아름다웠어. 어느 곳에 가도 반짝반짝 빛났어. 굼백화점 앞의 전구들, 붉은 광장에서 바라본 하늘. 황홀하고 꿈같았어. 초초 넌 날씨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밤이 긴 게 싫다고 했었지, 나는 밤이 긴 겨울이 좋다고 했고. 이곳에 백야의 계절이 다가와서 낮이 길어졌잖아. 그래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었어. 비현실적인 핑크 빛 하늘이 오랫동안 머물러줬으니까. 오늘은 너처럼 나도 낮이 긴 지금이 많이 좋아졌어.


 여기 와서 나는 삶이 너무 소중하다는 걸 느꼈어.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 지도. 열차에서 너랑 나랑 죽기 싫다는 이야기를 했잖아. 우리가 바라본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누가 알았겠어, 내가 살고 싶어질 만큼 좋아하는 도시가 생길 줄. 아직 세상에는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열차에서 본 풍경도, 오늘 우리가 조용히 바라본 밤하늘도 모두 새로웠어. 그러니 건강히 오래 살면서 우리가 몰랐던 것들 많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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