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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Feb 01. 2024

노을을 보면 미치는 병에 걸렸어

모스크바

솜에게


 그거 알아? 미인을 보면 기억을 잃는 대.
 그거 알아? 아름다운 걸 보면 기억을 잃는 대.
 그거 알아? 노을을 보면 기억을 잃는 대.


 모스크바강에서 쇼핑몰까지 노을과 함께했어. 청명했던 푸른 하늘은 남색으로,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건물은 자몽빛으로 물들었어. 새빨간 벽들은 남색 하늘과 대비되어, 현실감을 상실시켜. 하늘에 있는 자몽빛은 우리 눈으로 들어와 정신을 혼미하게 해. 노을이 지기 전엔 평범했던 도시가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아름답게 변해가. 


 우리의 목표는 7시쯤 쇼핑몰에 도착하기였는데, 해가 사라질 무렵에야 쇼핑몰에 도착했지. 멋진 광장과 아름다운 정원을 마주쳐 버렸기 때문이야. 광장과 정원 위로 노을이 내려앉은 모습을 보니 발길을 떼지 못하겠더라.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어. 그런데 솜아! 이상하게도 불과 몇 시간 지났을 뿐인데, 노을 지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아. 너무 아름다운 걸 보면 기억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걸까? 아니면 사진을 찍는데 정신이 팔려 기억하질 못하는 걸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이야. 정말 행복하고 벅찼어. 그거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기억은 사진이 하니까. 솜이 너는 그 순간 어떤 감정이었니? 

 아주 어릴 때는 다른 어린이들처럼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거든. 그러다 사춘기 때부터 시간이 빨리 가지 않길 바랐던 것 같아. 어른이 되기 무서웠거든. 앞으로의 인생은 더 힘들 것 같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어른들의 삶이 너무 버거워 보였어. 그래서 노을을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는 생각에 슬펐던 것 같아. 시간이 흐른다는 걸 시각적으로 인지해서 그런가 봐. 


 몇 년 전부터는 노을을 봐도 슬프지 않아. 이제 어른이 된 것을 받아들여서일까? 내가 생각한 어른은 과거를 책임지고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야. 너나 나나 한국의 교과과정 속에서 많은 선택을 해보질 못 했잖아. 교복도, 급식도, 학교도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따랐지. 우리의 인생 최대의 선택은 대학과 전공이었어.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시간표도, 출석도, 밥도, 옷도.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게 버거웠어.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내가 휴학한 이유도 진로에 대한 선택을 회피하기 위해서야. 그렇게 나는 새벽 5시에 잠들어 저녁 5시에 일어나는 휴학생이 되었어. 1달 넘게 백수생활을 해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산책하기와 일기 쓰기는 꼭 하고 잠들었어. 덕분에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더라. 결국 ‘현재의 게으른 나’는 ‘과거의 선택’들이 만든 것이고, 이런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 그렇게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깨달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된 것 같아. 


 그리고 여행. 여행이란 게 선택의 연속이잖아. 어딜 갈지, 무엇을 탈지, 어디서 잘지. 상상하고, 선택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선택을 즐기게 된 생긴 것 같아. 그 시작은 너와 함께 간 라오스 여행이야. 그땐 몰랐지만 그때의 경험들이 숙성되고 발효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아. 지금 너와 함께하는 횡단열차 여행도 마찬가지야. 상상에서 끝날 수 있던 것들을 너와 함께 현실로 만들고 있음에 감사해. 오늘 노을 속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발효될까?


ps. 노을에 대한 이야길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ㅎ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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