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초초에게
우리의 낮은 참 힘이 없었지. 우리의 밤은 참 힘이 넘쳤지. 오전 중에는 힘이 나지 않았어. 참새 언덕도 사실 그냥 그랬고, 푸쉬킨 미술관도 그냥저냥이었어. 그나마 성당은 볼만했었어. 처음부터 지친 상태로 다녀서 그런지 카페도 두 번이나 갔어. 무무에서 밥 먹은 게 낮 일정 중 가장 신났을 정도야. 근데, 두 번째 카페에서 나와 쇼핑몰을 향할 때부터 우리는 계속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 모스크바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를 또다시 현실이 아닌 곳으로 데려가버렸어. 우리는 선셋과 야경을 좋아하나 보다. 밤이 더 짧았으면 좋겠어. 대신 저녁이 아주 아주 길었으면 해. 꿈같은 분홍 빛, 그 아름다운 하늘을 계속, 계속 바라보고 싶어서. 내가, 우리가 좋아하는 풍경을 봐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정말 행복하다. 황홀해.
모스크바 강의 모습, 알렉산드라 동상, 언덕의 초록 풀 밭, 그 앞 공원의 꽃나무. 쇼핑몰 쪽의 분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더 아름답게 빛내주는 분홍 빛 하늘. 해가 완전히 지는 것이 아쉬워서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어. 모스크바에 있는 시간이,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 모스크바가 이리도 아름다울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오래 머물걸. 숙소로 돌아오는 길 까지도 곳곳의 야경이 아름다워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한 시간이 선명해. 또 오면 되지 싶다가도, 이 시간이, 이 하늘이 이때에만 우리에게 허락된 것 같아서, 잠시동안 우리에게 머물러준 것 같아서 아쉬워. 그래서 계속 멈추어 사진이라도 남기려 노력했나 봐.
아쉽지만 모스크바 여행이 끝났어. 우리의 마지막은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 궁전, 그리고 붉은 노을을 바라봤던 붉은 광장이었어. 아쉽게도 마지막 붉은 광장은 회색 빛 하늘과 함께했지. 아름다운 붉은 광장은 없었지만 이상한 경험을 하나 했어. 모르는 사람이 우리 사진을 찍어갈 줄이야. 근데 그 사진이 너무 예뻐서 꼭 받고 싶어. 사진 전해주겠지? 줄거라 믿어본다.
붉은 광장을 제외한 다른 곳은 그냥 그랬어. 성 바실리 대성당도 별로였어. 가이드 투어로 설명을 들으며 관람했으면 좋았을 수도 있겠다. 사방이 가이드 투어로 온 단체 관람객이어서 정신은 하나도 없지, 박물관 동선도 복잡하지, 정보도 잘 모르겠지. 쉽지 않았어. 정말 성당인 줄 알았는데 박물관이었다는 실망감도 들었어. 궁금증도 많이 생겼어. 출입구들은 왜 비스듬하게 만들어졌을까? 창틀은 왜 많은 걸까? 벽은 계속 유지된 진짜 벽일까? 어떻게 생각해? 알고 있다면 답을 알려줘.
크렘린 궁전 입구를 한참 찾다가 겨우 입장했잖아. 나는 횡단열차에서 니키타의 이야기를 듣고 내부로 들어갈 필요가 없을 줄 알았어. 괜히 벤치에 앉아서 추위에 떨었네. 짧은 영어가 통탄스러워. 성벽 내부로 들어가는 티켓을 구입해서 들어가야 하는 거였어. 궁전이 정말 깨끗하게 유지되어서 놀랐어. 다행히 잠시동안 비가 그쳤어. 그 덕에 우린 또 신나게 셔터를 눌러댔고.
우리의 이동은 늘 쉽지 않아. 이동하는 날마다 비가 오네. 모스크바가 너무 좋아서 앞으로 갈 도시들이 이만큼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해. 거기다가 모스크바의 마지막에도 자꾸 비가 내려서 슬펐어. 푸른 하늘이 선명한 모스크바를 볼 수 없다니, 아쉬움을 심어주네. 이곳의 야경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도 참 슬퍼. 찰나의 순간이기에 그 모습이 더 꿈같고, 아름다운 것이겠지?
여행이 꽤 진행되어서 많이 지친 것 같은데, 얼른 회복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보고. 별 탈 없이 걸어 다니자. 나만 지친 건가. 나도 모르게 예민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 모든 여행이 즐겁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지치면 작은 것에도, 평소에는 아무런 생각 안 드는 것들에도 싫어지는 순간들이 생기더라. 얼른 이런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그냥 다 좋은 시간만 가득하기를.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스크바를 낭만의 도시라고 정했어. 언젠가 지난 여행들을 떠올렸을 때 모스크바를 가장 먼저 추억할 것 같아.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먼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모스크바에서의 나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