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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Feb 06. 2024

Blue & Gray

상트페테르부르크

솜에게


 상트는 비가 와. 습하고 추워. 비가 하루종일 오는 건 아니지만 계속 흐린 하늘이야. 햇살이 별로 없어서 이전보다 기운이 없는 것 같아. 그래도! 힘내서 다녀야지! 


 내가 생각한 모스크바의 색이 red였다면, 상트는 Blue & Gray야. 건축물들은 푸른색인데 하늘엔 매일 구름이 껴서 그런가 봐. 아직 밝은 날을 못 봐서, 도시도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떠나기 전에 밝은 날을 봤으면 좋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수도였어서 그런지 유적지가 참 많더라. 관광객으로 붐벼서 정신이 없어. 모스크바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단체관광객이 이 정도로 많지 않았는데, 상트에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정말 많아. 유럽에서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단체 관광객도 많고.


 오늘 우리가 갔던 예르미타주 박물관은 궁전의 일부래. 처음 가려고 한 겨울 궁전의 확장 버전이라 했나, 신관이라 했나. 잘은 모르겠어. 너도 알다시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은 철거하지 않고 보존을 해. 하지만 왕족이 없어지거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하게 되면 원래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지.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뮤지엄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거야.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뮤지엄의 소장품은 늘고, 다시 증축을 해. 100년 뒤에 늘어날 소장품까지 고려하지. 예르미타주 박물관도 마찬가지야. 뉴욕의 현대미술관인 MOMA, 그리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증축 프로젝트에서 본인의 건축적 철학과 역량을 잘 보여주면 스타건축가가 되기도 해. 나는 아직 건축에 대한 철학도 없고, 그만큼의 애정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너랑 여행도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듣고 느끼다 보면 나도 철학이란 게 생기지 않을까?


 늦잠을 자서 처음에 가려고 한 겨울궁전을 못 봐서 좀 아쉽다. 사진을 보니 오늘 간 예르미타주 박물관과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이더라. 경복궁을 제외한 궁전은 처음인데, 유럽의 궁전은 정말 만화 같다! 이런 오래된 건축물에 들어가면 과거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그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데, 건물은 남아있다는 게 새삼 신기해.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먼 나라의 사람들이 매일 방문하고 있잖니. 겨울궁전의 건축가는 상상이나 했을까.

 건축학과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의 건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어. 건축물을 작품이라고 생각했지. 학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건축에 대한 설렘은 부담으로 바뀌었어. 지구상에서 꽤나 큰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인공 공간은 생명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환경파괴는 너무 유명하니까 차치하고. 사람의 무의식과 공간에 대해 말해볼게. 혼자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살찌거나 우울해하는 친구들이 있을 거야. 살이 찌는 건 배달음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간의 영향도 있어. 좁은 공간에만 있다 보면 사람의 행동반경은 줄고, 사고의 폭도 줄어들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공허함을 느끼잖아. 그 공허함은 친구, 취미, 소비, 음식 등으로 채우지. 원룸에서 가장 빨리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배달음식이야. 이렇게 공간은 정신을 넘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지. 건축은 알 수록 무거워.


 내가 너무 건축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건축물이 많아서 그랬나 봐. 모스크바에도 많았지만, 노을에 취해서 건축물을 볼 정신이 없었어. 편지에서 건축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지 몰랐는데, 재밌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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