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끄로 Feb 07. 2024

비도 오고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초초에게


 실질적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첫날. 시작부터 우당탕탕. 갑자기 헤어드라이어가 터졌고, 숙소는 정전.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급하게 연락하는 것으로 어쩐지 불안 불안한 하루가 시작되었어. 앞으로 영영 드라이어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일까? 불은 다시 켜지겠지? 숙소를 옮겨야 하는 걸까? 환불은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 내가 고른 숙소인데 이런 일이 생겨서 미안했어. 아침부터 불안한 마음이 컸을 텐데, 괜찮았니? 다행히 전기가 멀쩡히 다 돌아왔네. 숙소도 안 옮겨도 되고, 이제 이곳은 홈 스위트 홈이다.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는 인생. 날씨 영향으로 급히 계획도 변경했잖아. 비가 그렇게 쏟아질 줄이야. 반지하 같은 우리 숙소에 비가 들이치지는 않겠지? 추운 나라라 그런지 문도, 창문도 아주 묵직하니 우리는 안전할 것 같아. 하루 종일 고생한 거 잊힐 만큼 모든 게 해결되었어. 숙소에 와서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시간이 편안해서 다행이야. 평온한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밖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빗소리가 운치 있고 좋다.

 겨울 궁전에 가려던 우리는 늦잠, 날씨, 정전 등 갖가지 문제로 느지막이 숙소를 나섰어. 모스크바에서 너무 신난 채 여행을 다녀서 그런 지. 우리 둘 다 몸 상태도 말이 아니야. 예르미테주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비둘기를 찍었다가 무서운 러시안한테 삥 뜯길 뻔했고. 갑자기 소리치며 달려와서 어찌나 놀랐는지. 네가 내 손잡고 자리를 뜨지 않았으면 난 그대로 거기서 굳어 버렸을 거야. 앞으로의 여행은 혼자인 시간이 더 길 텐데 이런 고난이 또 오면 어떻게 헤쳐나갈까. 


 놀란 가슴 가라앉히고 박물관으로 향했어. 예르미테주는 세계 3대 박물관답게 규모도 엄청나고 화려했어. 우리가 입장했던 시간이 마감 1시간 30분 전쯤이었나? 일주일을 잡고 와도 부족할 공간을 짧게 보려니 뭐부터 봐야 할지 순간 멍 했어. 늦게 와서 박물관을 전세 낸 기분에 행복하기도, 이 좋은 곳을 짧게 보게 되어 아쉽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어. 나는 그냥 그 공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어. 그제야 한적한 박물관의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오더라. 나는 원래 작품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사람이 아니라 동선, 액자, 공간 구성 같이 큰 덩어리를 보는 걸 좋아해. 사람 없는 마감 시간의 박물관에서 그런 걸 온전히 즐길 수 있어서 좋았어.

 박물관 마감 시간 즈음 퇴장해서 나 혼자 먹을 저녁을 사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로 향했어. 체한 와중에도 밥 사러 함께 나가줘서 고마워 친구야. 근데 나도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해 보면 저녁은 사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도 스타벅스에서 인도인 친구도 사귀고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어.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후회되는 외출이었을 것 같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크게 기대를 하고 왔는데 날씨 영향일까? 아직까지는 엄청나게 좋다거나 큰 감흥은 없어. 파란 하늘, 핑크빛 선셋.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이런 거야. 비 오는 날씨도 언제 경험하냐며 괜찮다고 했지만, 자기 최면이었나 봐. 앞으로의 예보도 계속 비야. 잠시 기다리면 그치는 비였으면 좋겠어. 비 오는 날씨, 푸른 하늘, 선셋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소심하게 바라볼게.


 오늘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질적인 첫날이었어. 하루 여행해 보니 어때? 자꾸만 비가 오고, 체력이 떨어져서 난 좀 힘들었던 것 같아. 그래도 뜻밖의 일들이 즐거움을 선사한 하루였어. 그렇게 긍정적으로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자. 내일은 오늘보다  즐겁고, 건강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전 18화 Blue & Gra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