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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29. 2024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두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초초에게

자고 일어나니 많은 사람들이 떠났어. 이제 우리도 내릴 때가 되었다는 게 이상한 아침이었어. 이것도 이별이랄 수 있나? 열차에 있던 사람들이랑 얼굴을 마주한 건 고작 며칠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들었나 봐. 깊은 마음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아서 저들의 이름도, 나이도, 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따뜻한 사람이라는 거야.


 나는 횡단열차에서 꽤 많은 것을 느꼈는데, 너는 어때? 먼 훗날에도 나는 횡단열차라는 공간에서의 감정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나의 시간 속 중요한 장면을 차지하게 될 것이란 게 느껴졌어. 기억의 파편 중 아주 큰 조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런 경험을 하자고 제안해 줘서 고마워.


 올해는 유독 많은 처음을 경험한 해였어. 기억에 남는 처음이 많았다고 해야 맞는 말일까? 처음 회사원이 되어봤고, 생각지 않았던 업계에 발을 들여보기도 했고, 월급도 밀려봤고, 퇴사도 해봤어. 나열해 보니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런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가장 강렬한 건 시베리아 횡단열차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어. 가까운 기억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에게 많은 변화를 줘서. 조금 더 나랑 친해질 수 있었던 시간이어서.

나에게는 기약 없음이 주는 불안감이 있어. 오히려 정해진 기약이 주는 안정감이 있달까. 신기하지? 정해진 시간이 내게 주는 게 불안함, 조급함이 아니란 것이. 그냥 언젠가 뭐든 끝난다는 안도가 나에게 주는 편안함이 있어. 내가 기약 없는 무언가를 싫어해. 끝이 없다는 막연함이 무서워. 끝맺음을 하고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 그 보람과 설렘을 평생 느끼며 살고 싶어. 내가 이번 횡단열차를 타면서 느낀 건 그거야. 끝없이 긴 것만 같은 횡단열차 여행도 어쨌든 명확한 끝이 있잖아. 모스크바에 도착한다는 것.


 네가 자는 동안 나는 주황 청년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눴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 만은 않나 봐? 짧은 대화로 뭘 알겠냐만, 아무튼 그 사람이 나에게 전한 말들은 다 좋았거든. 모스크바에서 가봐야 할 곳들을 알려줬는데 짧게 지내는 동안 차분히 둘러보자. 사실 잘 못 알아들었어. 근데 기장님한테 펜까지 빌려서 자세하게 이것저것 써줬거든? 잘 읽어보자. 도움 되는 정보 같아.

 아까 주황 청년이 배웅해 준다 한 거 거절했잖아. 그거 조금 후회했다? 여행을 하면 누군가의 선의를 무섭다는 생각에 거절하게 돼. 선의를 선뜻 받아서 얻는 행복도 있을 텐데.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이 무섭게만 느껴져서 경계해. 우리한테 한국 동전이 가지고 싶다고 다가온 사람들도 괜히 이상한 사람일까 봐 안 줬잖아. 그깟 동전이 뭐라고. 우리한테 15 루블을 꺼내주면서 '이런 동전쯤은 별 거 아니야! 기념으로 가져!' 할 때는 괜히 부끄러워졌어. 여기까지 온 거면 우리 꽤나 용기 있는 사람인데, 좀 더 마음을 열고 다녀야 하나 봐.

우리가 이 열차를 타서 가장 많이 마음을 나눈 언니들과도 이제 영영 이별해.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과 오래도록 이어갈 수 없다는 점이 속상하면서도, 그 잠시의 시간이 주는 따뜻한 온기와 힘이 참 좋아. 오랜 인연들과 다른 무언가를 주는 것 같아. 아쉬움은 뒤로하고 이제 우린 두 발을 내디뎌 진짜 여행을 시작해. 너와 나의 첫 모스크바 열린 마음으로 많은 걸 품어보자. 오늘따라 주절주절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함께 와서 참 좋고, 좋다고.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지금은 마냥 좋다. 앞으로도 마냥 좋아보자. 이번 여행도, 우리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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