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초초에게
오늘은 내 생일. 해피버스데이 나! 해외에서, 그것도 러시아에서 맞이하는 생일이라니. 즐겁고 신기해. 아침에는 미역국, 저녁에는 케이크를 준비해 줘서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생일이야. 오늘 갔던 곳들이 다 좋았어. 성 이사악 성당도 참 예뻤고, 마린스키 극장에서 본 공연도. 전부 황홀했어. 마린스키에서 공연볼 때는 꿈같았고. 나한테 좋았던 하루였던 만큼 너에게도 좋았으면 해. 화려하고 예뻤던 성이사악도, 비싼 만큼 볼거리 풍부했던 마린스키도, 모두모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생일을 보냈어. 내 인생에서 러시아 여행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곳에서 생일을 보내고 있네. 아침부터 네가 끓여준 미역국으로 행복하게 생일을 시작했어. 성이사악 성당을 처음으로 오늘의 여행도 시작했고. 성 이사악 성당 내부는 이제껏 갔던 성당 중 가장 화려했어. 모스크바에서 갔던 성 바실리 성당처럼 박물관 같을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기대 없이 들어가서 그런가? 더 좋았어. 탑에 올라가서 도시 전망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어. 오늘의 시작이 좋았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만큼 개운할 때가 없어. 탑을 올라가기 전에는 아득한데 막상 올라가면 뻥 뚫린 경치에 압도 돼. 이번에도 그랬어. 생각보다 성이사악 성당에서 긴 시간을 보냈네.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 카페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돔끄니기에 다시 갔지. 이제껏 갔던 기념품 상점 중에 가장 종류가 많았던 것 같아. 서점이어서 그런가?
나는 여기서부터 어린 왕자를 모으기 시작하려고. 너무 의미 있지 않아? 생일날, 처음으로 외국에서 생일을 보내는 거. 거기다가 그 나라 언어로 된 어린 왕자를 처음으로 사는 거.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갈 많은 나라들에서 수집할 거라는 거. 내가 기분 좋게 추억할 것이 하나 더 생겼어. 이제 어린 왕자만 보면 행복한 오늘이 생각날 거 아니야. 행복한 내 생일도, 러시아도, 네가 만들어준 황홀한 하루도.
또 다른 의미 있는 생일을 만들어 준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본 거야.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극장에서 생일을 보냈어. 극장은 내 운명인가. 나는 그냥 극장이 좋아. 그 냄새, 들어갈 때 느껴지는 설렘 그런 것들이. 발레를 보는 내내 이곳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 너무나 황홀해서 꿈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어. 그래서 나한테 버킷리스트가 생겼어. 20대의 남은 생일 중 하루는 드레스업 하고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보기. 다섯 번 남은 나의 20대 생일 중 한 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꿈같았던 생일을 보내고 비를 맞으면서 숙소로 돌아왔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나에게 비의 도시로 기억될 것 같아.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야. 오늘의 비는 낭만. 촉촉한 비 냄새, 습한 공기 전부. 다들 택시 잡고, 집에 가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숙소가 가까운 우리는 씩씩하게 걸었어. 기분 좋은 생일의 마무리를 향해서.
초초가 돔끄니기에서 나를 두고 몰래 가서 사 온 케이크로 생일 기분도 내고, 마트에서 성공적으로 장보고 만들어 먹은 한식까지. 완벽한 하루가 저물었어. 무엇보다 내 생일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건 함께 여행 온 초초 너야. 미역국도, 생일 케이크도 상상 못 했거든. 이번 생일에 미역국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냥 해외에서 생일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설렜어. 네가 이렇게 준비해 올 줄이야.
돔끄니기에서 네가 사라졌을 때도, 상자를 품에 안고 돌아왔을 때도 그게 내 케이크라는 걸 몰랐어. 그냥 돔끄니기에서 기념품 산 줄 알았어. 친구들 선물을 좀 샀나 했지.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골라왔어?
운수 좋은 날처럼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하루였어. 불행의 전조인가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생일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나에게 생일은 외로운 날이었는데, 오늘은 그저 충만한 날이 되었어. 너에게도 충만한 하루였기를. 한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너의 생일을 만들어 줄 기회가 나에게도 온다면, 나 또한 너에게 근사한 하루를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