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너에게 편지를 쓰던 그때에도 유럽이었는데, 나는 다시 유럽에 있어. 유럽여행을 좋아하다 못해 유럽권에서 살고 있네. 너와 함께 갔던 프라하도, 너와 헤어지고 갔던 오스트리아에도 다시 다녀왔어. 아, 그리고 너 혼자 간 드레스덴도 다녀왔네. 몇 번을 가도 좋은 곳이 있더라. 다음에는 너와 함께 가고 싶다 했는데, 이곳에서는 제주도 가듯 여행을 다니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편한 그곳으로 그냥 훌쩍 다녀와버렸네.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어. 여전히 게으르고. 내가 상상한 29살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어. 근데 나는 회사가 정말 안 맞는 사람이더라. 회사가 잘 맞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9시부터 6시까지 사무실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다는 사실부터 납득이 안 갔어. 그게 나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건지 많이 아프기도 했어. 그리고 무턱대고 답을 찾겠다고 퇴사를 해버렸지. 그게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네. 근데,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대체 뭘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어.
나는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끝이 불확실한 것에도.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지. 머무르지 않고, 끝이 있는 것이니까. 근데 생각지도 못한 판데믹이 닥쳤어. 러시아 여행을 할 때에만 해도 국경을 넘나들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었지. 코로나 거리 두기로 집에서 혼자 있는 동안 러시아 여행 사진들을 많이 봤었어. 아, 이제는 절대 못 가겠구나. 언제쯤 해외에 나갈 수 있을까? 막연하게 그리워만 했는데 이제는 너도 나도 국경 넘어 한국 바깥에 있네. 너도 알다시피 러시아 여행 다녔을 즈음의 나처럼 지금도 혼자 이 나라, 저 나라 여행하며 살고 있어.
내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막 적응했을 즈음, 네가 여행에세이를 함께 쓰자고 했어. 네가 준 편지는 당연스럽게도 모두 한국, 우리 부모님 집에 보관해 둔 상태였지. 그래서 나는 네가 준 편지를 일 년 후에나 볼 수 있는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어. 너는 선뜻 차로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우리 부모님 댁까지 가서 편지를 찾아와 줬어. 그래서 몇 년 만에 나는 그때의 너와 나를 마주할 수 있었어. 다시 읽으니 그때의 우리 꽤 괜찮았다?
내가 너에게 쓴 편지, 네가 나에게 써준 편지, 그때 내가 쓴 일기를 모두 다시 모아 읽어보다가 왈칵 눈물이 난 적도 있어. 그 감정의 이름은 사실 잘 모르겠어. 그리움일까? 아니면 슬픔? 위로? 대견함? 여전히 모르겠다. 복합적으로 모든 것이 뒤섞여 나타난 감정이겠지.
몇 년 전, 스스로를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냥 그 당시의 모습이 부끄러웠어. 어린 시절의 내가 고작 커서 된 게 이런 사람이라니, 하는 무력감이 들고. 그래서 미래의 내가 궁금하지도 않았던 시기가 있었어.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것 같지 않았거든.
이제 돌아보니 나, 그러지 않아도 됐어. 과거의 나도 괜찮았고, 지금의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 같아. 내가 꺼내볼 수 있는 찬란했던 옛날이 꽤 많고, 그것들이 모여 더 좋은 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 그중 꽤 큰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너와 함께 간 여행이야. 네가 준 이 기회가 나에게 큰 위로를 줬어.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한 것도, 지난 여행을 다시 끄집어보자고 한 것도. 그 모든 것이 다시 내 예쁜 과거들을 모아볼 용기를 줬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 또 여행 갈래?
솜에게
얼마 전에 방청소를 하다가 너와 유럽여행 중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견했어. 몇 년 동안 잊고 살다가 찾으니까 너무 반갑더라. 횡단열차가 출발할 때 네가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자고 한 순간이 기억나. 그 당시엔 꽤 귀찮았어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쓰길 잘한 것 같아. 덕분에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여행이 생생하게 떠올라.
편지를 읽다 보니 꽤나 재밌어서, 세상에 공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여행편지들을 엮어 책을 내고 싶어졌어. 그래서 영국에 있는 너에게 카톡을 보냈지.
“솜아, 우리가 썼던 여행편지로 서간문 형식의 여행에세이를 써보지 않을래? 일단은 브런치 연재부터 시작하자! "
너에게서 답장이 왔어.
“좋아! 우리 그럼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어서 같이 키우자!”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편지에 살을 보태어, 다시 우리 만의 여행을 써 내려갔지. 브런치를 통해 너와 다시 여행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어. 무엇보다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너는 느끼고 기억한다는 게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어. 잘 숙성된 김치 같은 여행의 기억에 너의 기억이 더해져 더 풍성해졌단 말이지.
우리가 횡단열차를 탄지 벌써 5년이 지났구나? 20대의 한가운데에 있던 우리는 어느새 30대를 앞두고 있어. 5년이란 시간 동안 우린 복학을 했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 학교를 졸업했고, 취업도 하고 퇴사도 했어. 나는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돌이켜 보면 꽤 많은 걸 했다? 게다가 너는 지금 영국에서 워홀 중이고. 정말 열심히 살았네 우리.
나는 지금 푸켓이야. 3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따뜻한 나라로 왔어. 너와 함께한 여행 이후로 5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에 왔어. 꽤 많은 시간 동안 나를 통제하며 살았던 것 같아. 그동안 기쁜 일도 많았지만, 깨지고 아픈 순간들도 많았지. 그래도 이러한 과정 덕분에 나를 더 알아가며 성장할 수 있었어. 나는 이제 본래의 자유롭던 나로 돌아가려 해. 앞으로 1년이란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려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기 싫은지 좀 더 천천히 멈춰서 생각해 보고 실험해 보려고. 책임과 자유 그 사이 어디서 나의 균형을 찾고 싶어.
나보다 1년 먼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너는 어떠니? 얼른 런던에 가서 너의 삶을 직접 보고 싶다. 그래! 이제 나도 시간의 자유를 얻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또 여행 가자! (이번엔 유럽 말고 남미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