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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Feb 21. 2019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세상의 것들

우울하다, 우울해

나는 쉽게, 그리고 자주 우울감에 시달려왔다. 식욕이 있으면 우울증이 아니라는 엄마의 말에, 그래, 그럼 나는 우울감이지 싶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1, 2월에 유독 더한데, 대학교 4학년 올라가던 겨울엔 꾸역꾸역 삼킬 수 없는 수준이어서 학교 상담실 문턱을 드나들었다.


이렇게 마음에 독이 둑처럼 켜켜이 쌓이는 날엔 나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 몇 가지 단어들이 고개를 쳐든다.

열등감, 압박감, 권태

주로 외모, 커리어,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을 타인의 것과 비교하면서 시작되는 열등감. 그것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큰 모습의 열등감을 데려오고 자괴감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남에게로 향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고깝게 들리고 내 눈과 입에서는 절대 말간 빛이 나지 않는다.


두 번째, 압박감은 사회와 내가 만든,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이미지' 속에 스스로 갇히는 순간 불쑥 찾아온다. 나 같은 경우엔 '바르고 성실하며 명랑한 사람'이 그것인데, '좋은 딸', '잘 웃는 친구', '밝은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다. 이는 때로 걷잡을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철저히 복종하게 한다.


짧든 길든 함께 여러 계절을 지나온 사람들은 내가 참 잘 웃는다고들 한다. 사실, 그 사람의 말이 그리 웃기지 않은데 내 얼굴은 웃고 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이미 웃고 있고, 웃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웃고 있다. 잘 웃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 감히 상상하지 못할테다.


이상적이고 구체적인 자아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에는 가정환경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데,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경우 유독 그렇다. 부모가 자녀에게 거는 기대와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날아오는 질책,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마지막, 권태. 이 단어를 마지막에 둔 이유가 있다. 앞의 두 단어보다 가장 무겁고 가장 무섭다. 권태가 길어지면 허무에 빠지기 쉽고, 이내 모든 것에 무감해진다.


과제든 업무든 집안일이든 간에 무언가에 몰두할 때는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 일이 끝나면 어떤 상실감이 찾아온다. 혹자는 또다시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를 잊을 만한 일을 찾아나서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상태에 함몰되기도 한다.


그 상태가 바로, 무감. 말그대로 관심이나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심지어 나의 몸상태가, 나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도 감각하지 못한다.


세상의 색깔을 읽어내지 못하는 일은 슬프다. 나도 종종 이 무감의 상태에 젖어드는데 문득 등골이 섬짓해진다. 스스로가 온통 회백색으로 칠해질까봐, 아니 회백색 그 자체일까봐.

내 하루의 대부분은 이 세 단어가 만드는 지독하고 비릿한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는 시간이다. 그러다 잠시 일렁이는 우울의 바다 밖으로 나와 숨을 내뱉을만한 밤이 찾아오면 이렇게 글을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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