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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Feb 21. 2019

슬픔을 다루는 방식

늘 조심해야 하는 일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몹시 좋아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를 봐왔고 인생의 요소들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접해왔다. 하지만, 이제서야 미디어의 표현방식에 하나 둘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이 개봉했을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타과인 국문과 수업을 혼자 듣는 패기가 있던 때였는데, 서로의 언어로 서로의 생각을 꺼내야 하는 수업이었다. 그 날은 '귀향'과 '눈길'을 보고 비교분석을 하는 수업이 진행됐는데,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섬세한 시선으로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위안부 피해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몇몇 학생들은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귀향'은 폭력적인 그 행태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관음증적인 시각으로 묘사하는 반면 '눈길'은 그러한 장면들은 줄이고 두 소녀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는 모습에 집중했다.


그 학생들은 '귀향'은 위안부 피해자의 환부를 꺼내어 다시한번 상처를 주는 일을 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여태껏 나의 세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롭고 다정한 시각이었기에 나는 그저 벙쪄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만큼,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상처 입은 자들을 하나의 영화적 캐릭터로 소비하고
무책임하게 관망하는 일.
미디어가 이것만큼 경계해야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뉴스를 볼 때에도 우리는 수많은 사건 사고를 하나의 '이미지'로 '빠르게' '지나치며' 보게 된다. 치약거품을 물고 이를 닦으며, 혹은 과자를 아그작 씹어먹으며 누군가 다치거나 건물이 붕괴되거나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가만히 '응시'하며 혀를 끌끌찬다. 이렇게 관망하는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 새 실제 사건이 아니라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소비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바라보지 않도록 애쓰지만, 지금 시대에서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미디어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버릇처럼 '죽고 싶다', '살기 싫다' 등 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말들을 무심하게 뱉는다. 이 지저분한 언어습관은 과거의 내 혀에 배어있었고, 문제의식도 뇌에 들어 있지 않았다.


삶을 매순간 진중하고 무겁게 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소롭게 여길 만한 종류의 것은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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