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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Oct 04. 2020

나의 코로나 9월

민음사 릿터 독자 수기 공모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에 높이뛰기를 배웠다. 앞으로 달려 나가 도움닫기 판을 밟고 바 위로 몸을 날리는 행위. 나는 이 행위를 좋아했다. 바를 넘어갈 때 등허리가 완만하게 휘는 느낌은 자유로웠고, 여름 볕에 달궈진 매트가 몸을 받아내는 느낌은 포근했다. '내가 이렇게 날아올라도, 이렇게 몸이 휘고 뒤로 넘어져도 괜찮구나' 생각했다. 어쩐지, 이번 9월엔 이때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날이 많았다.


높이뛰기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포괄임금제 미디어 노동자이자 무주택자 세대주다. 1년이 넘도록 내 생각의 결이랑 다른 영상을 제작하면서 환멸이 나기 시작했고, 자매품처럼 자괴감이 따라왔다. '일은 그냥 일이야'라는 말에 고개를 내젓고 낭만을 덧입히며 살아온 나에게 돈 벌려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한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부끄러운 9월의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쿠팡과 마켓 컬리, 오늘의 집을 바쁘게 오가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순간 '이런 굴욕감이 어쩌면 사치일까'라는 생각이 화면 위 광고 팝업처럼 떴다. 그리고 그 팝업창은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에 얻은 건 단 하나, 생존 감각이다. 높지도 않은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워진 탓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명을 연장하는 일, 즉 죽음을 보류하는 일이다. 이왕이면 좋은 쌀, 좋은 커피, 좋은 이불. 갈수록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잘 때 회사 쪽으로 머리도 두기 싫은 마음을 이기는 건 돈이었고, 그 돈은 삶을 이어가게 한다. 그리고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스스로를 좀먹게 한다. 회사를 관두는 용기도, 다른 흥미로운 일을 찾을 힘도 없는 지금. '이렇게 날아오르면, 이렇게 몸이 휘고 뒤로 넘어지면,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한다. 코로나는 도움닫기 판과 매트 모두 훔쳐갔고, 나는 무력하게 도둑맞았다.


25살 나에겐 환갑을 앞둔 아빠의 냄새가 난다. 패기도 객기도 열정도 보람도 실망도 기대도 없는 사회생활에서 묻은 냄새 말이다. 어쩐지 나에겐 계속해서 아빠의 냄새가 난다. 지우려고 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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