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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Sep 20. 2017

어느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영화 '이다'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며 개인이 하는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을 통해 발현된 고유의 것인가, 아니면 특정 사회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현된 것인가. 이 질문에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이다>는 후자에 속하는 듯 보인다.


 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모님을 여의고 갓난아기 때 수녀원에서 자라 어느 새 서원식을 앞둔 수녀다. 이다는 서원식을 하기 전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 그루즈에게 다녀오라는 조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완다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임과 동시에 그 이유만으로 자신의 부모와 완다의 아들이 나치당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다는 완다와 함께 척박한 땅 어딘가에 묻혀있을, 부모의 묘를 쓰기 위해 그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처음 바깥구경을 한 이다는 우연히 만난 색소포니스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우여곡절 끝에 부모 시신이 묻힌 위치를 알아내 유골을 수습한다. 이다의 서원식을 앞두고 이다와 완다는 안녕을 고하지만 견딜 수 없는 삶에 고통스러워 하던 완다는 자살을 한다. 이다는 그의 장례를 치룬 뒤 서원식을 미루고 나와 하루 동안 ‘일탈’을 하고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된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우리집 뒤뜰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으며 강물엔 핏빛만이 비칠 뿐이다. 그러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파편이 튀어 살갗에 박히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격동하는 사회가 폭풍우처럼 치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개개인이 살아가야 하는 삶 자체다. 이다 그녀의 삶처럼. 이다는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를 여의고 수녀원에 버려지듯 홀로 남겨져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수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라는 이모는 이틀 전에 처음 만났고, 그와 함께 부모의 얼굴이 아닌, 유골을 찾아 나선다. 완다라고 다르지 않다. 동생네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어린 아들까지 잃었다. 심지어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의 생을 끝낼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아 그것을 행사해야하는 비극적인 업까지 맡았다. 이처럼, 전쟁이 훑고 간 뒤에 남은 인생들이 감내해야할 몫은 너무나 무겁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마지막에 이다는 색소포니스트와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고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과연 어느 누가 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서원식까지 미룬 그녀가 다시금 수녀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릎 꿇고 신께 기도드리는 것뿐인 그에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어딘지, 하룻밤 사이에 ‘일탈’을 끝내고 되돌아가는 이다의 눈빛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결연해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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