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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Sep 08. 2018

와, 오늘 하루도 부질없었다!

우주먼지 같은 나의 주말

암막커튼 사이로 살며시 스며드는, 한껏 바삭해진 가을빛을 알람 삼아 7시 즈음에 눈을 뜬다. 이런 나의 생체 리듬에 박자를 맞추듯 꼬리를 방방 흔들며 들어오는 구름이의 얼굴에 얼굴을 살짝 묻는다. 바나나에 빵 한조각으로 때울까, 아니면 밥을 먹을까 잠시 고민을 한다. 아침을 먹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뒤이어 딸깍! 꺼지는 버튼소리에 네스프레소 커피 가루에 물을 자작하게 부은 뒤 3배 많은 양의 우유를 붓는다. 엄마와 나만의 라떼 레시피다.


혀 반토막은 아직 꿈에 잠긴 듯한 발음으로 '구듬아, 산책가꽈?' 하는데도, 산책이라는 단어는 기똥차게 알아듣고 동그래지는 검은 눈동자를 보고 가슴줄과 리드줄을 주섬주섬 챙겨 나갈 채비를 한다. 아직은 이른 감이 있는 8시 쯤이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녹는 듯했던 올 여름, 해가 아직은 하얀 빛일 때 산책가는 게 습관이 된 탓이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이지만, 수개월 몸에 새겨진 계절의 자욱은 꽤나 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오늘은 어떤 산책 코스로 갈까 속으로 뇌까린다. 하지만 오늘도 결국 늘 가던, 가장 산책하기 좋은 공원으로 간다.

1시간 내내 차나 오토바이가 언제 튀어나올까 조마조마한 내 심정은 신경쓰지 않는 듯 발발대며 걷는 구름이의 발장단에 맞춰 걷는다. 리드줄과 함께 예의라는 것을 집에 두고 온 보호자와 반려견을 만날 때면 옆에 걷는 애만 들을 수 있을 만한 소리로 욕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다 중간중간 의자에 앉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에 떠다니는 상념들을 얹어보고, 수십번도 넘게 킁킁대며 다른 개가 싼 똥오줌 냄새 맡는 애를 기다려준다. 이렇게 이래저래 오전 일과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그 무엇보다 의미없는 오후가 시작된다.  

바삭한 가을빛에 얼굴 반쪽이 그늘져 의도치 않게 인생샷 건진 구름.

내일이 반납일인데 띄엄띄엄 읽느라 반도 채 못 읽은 책을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고, 영상은 장비빨이라는 말을 되뇌이며 노트북 화면 안의 카메라들을 또 훔쳐본다. 그리곤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당장 끌리는 영화를 한 편 골라본다. 꼭 뭘 보고 있을 때, 부엌 싱크대 앞에 앉아 마! 마! 나즈막히 짖는 구름이에게 찬물을(미지근한 물은 있어도 안 마신다)떠다준다.


그러다 보면 부엌 쪽 베란다에 주홍빛 노을이 묵직하게 드리우는 해거름이다. '가을냄새난다!' 나의 외침에, 같이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는 엄마의 옆 얼굴을 본다. 구름이를 번쩍 안아들고 '구름아 너도 맡아봐'하는 엄마가 귀여워 미소짓는다. 그리고 정답없는 물음들, 지난 계절에 대한 회한 속 일말의 설렘을 곱씹는 오늘 같은 밤이 찾아올 때면 지금처럼 글을 끄적인다.


대학생 때는, 바쁜 생활에 중독되서인지, 오늘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끝자락마저 붙잡고 싶어 굳이 굳이 영화관을 간다거나 전시회를 가곤 했다. 근데 이번 봄의 어느 날, 이렇게 부질없이 보내는 하루가 그 어떤 하루보다 꽉 차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텅 비어있는 시간 속에 누워 무상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포근하게 일상에 파묻힐 수 있는 시간이 살면서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동기는, 가사 한줄이었다. 고 김광석씨의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의 후반부에 '스쳐가는 의미없는 나날을 두 손 가득히 움켜쥘 순 없잖아' 라는 가사가 나온다. 당시,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될 알 수 없는 조급함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이러니 내가 김광석씨 노래를 끼고 살 수밖에.


이 부질없는 우주먼지같은 주말의 일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지만 퍽 괜찮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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