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약 Jan 26. 2024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고

액땜 가득한 하루

한 2주전, 아빠에게 차를 받았다. 29만까지 탄 차를 시골로 보내고, 아빠가 차를 사서 이전에 타던 스포티지 구형을 받아왔다. 코란도에 비하면 후면카메라도 있고, 의자를 넓히면 훨씬 더 큰 그림도 있고, 차도 훨씬 상태가 좋아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차가 쌩쌩 잘 갈때까지는 말이다.


며칠전부터 새벽에 수영장을 가는데 아파트 후문 오르막길을 비실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차를 잘 고쳐타는 아빠는 내게 휘발유가 아직 안녹아서 그래, 시동걸고 4분 있다가 출발해봐. 라고 했지만 그래도 별 다른건 없었다. 광양보다 훨씬 추운 파주에서 와서, 야외주차장도 아닌 지하주차장에서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고 ? 뭔가 이상했지만 처음만 그랬고 차는 잘만 갔다.


그러다 느리게 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제 카센터를 진짜로 가야겠다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새벽에는 수영, 오전에는 봉사, 오후에는 미싱레슨에 컴퓨터 센터도 가야하고, 저녁엔 요가도 가야하는 굉장히 바쁜 하루였다. 그래, 아침 9시에 들렸다 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아빠가 오전엔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아빠가 타던 차기도 하고, 보통 카센터가면 나는 아예 모르니까 아빠랑 통화하는 경우가 훨씬 잦다. 오후 한시쯤 가서 전화주라고 했다.


어제 지인이 오픈한 맛있는 오리탕을 먹고, 배불러 일찍 잠들었다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났다. 영어, 중국어공부를 이틀이나 빼먹었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자리에 앉아 그것부터 했다. 시작한지 일주일정도 됐는데, 벌써 루틴이 자리잡은 모양이다. 그냥 보내는 하루와 루틴이 있는 하루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고 글을 쓰려는데 벌써 택이가 올 시간이다. 그래 매일 남편이 요리해주는데 설거지는 내가 다 해야지 싶어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평소에도 설거지는 내담당이 맞는데 오늘따라 그릇을 몇 번 놓쳤다. 컨디션이 별로 안좋나.. 싶었는데 와장창- 도예작가님이 직접 만들어준 귀하게 아끼던 그릇이 그대로 깨지고 말았다. 다행이 설거지하다 깨져서 크게 튀지는 않았지만 속이 상했다. 다른 그릇도 아니고, 색이 예뻐 아끼던거였는데. 옆으로 살짝 밀어놓던중 택이가 왔다. "어디 다친건 아니야?" 먼저 물어보는 다정함에 그래도 맘이 쏙 풀렸다.


택이가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해줘서 배추에 맛있게 싸먹고 오전 봉사는 못 간다고 연락했다. 아이를 낳기전 달마다 가고 싶었는데, 일말의 뿌듯함도 있었고. 아쉬웠다. 그리고 미싱은 본래 오전이였으니 오후에 가겠다고 연락을 했다. 어쩌다 오전 시간이 내내 비었고, 택이는 웃으며 좋아했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이거다. 스피커 밑에 먼지가 굴러다니는게 보였다. 그래 오늘은 청소를 하자.


거실에 크게 짐을 두지 않아 청소가 빨리 끝나는 편이였다. 빨래를 돌리고, 의자를 전부 식탁위로 올리고 로봇청소기를 두개 돌렸다. 마침 침대 온수매트가 많이 내려가 있어 침대의 옷을 벗기고 다 끌어올렸다. 시트도 털고, 이불도 털고, 베게도 다시 다 올렸다. 침대가 주문제작한거라 사이즈가 꽤 크고 높은데 내가 요즘 힘을 쓸 수 없어 많이 도움이 될 수 없었지만 둘이해도 힘에 부쳤다. 이전에는 택이 혼자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 빡셌지 뭐- 하며 배시시 웃는다. 나는 네 여유가 그렇게 좋아.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에게 물도 주고, 꽃이 핀 지네발은 거실로 거둬오고. 건조기에 있던 빨래도 꺼내 개고. 참 편안한 시대다. 나처럼 깔끔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참 살기 좋은 시대다. 물론 깔끔한 사람들은 훨씬 오래 걸리겠지만. 교대근무하는 택이가 자는 시간이 많아 사실 혼자 청소를 많이 했고, 온 대청소도 자주 하지 못했다. 진짜 오랜만에 같이 청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일을 쉬면서 확실히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제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도 한다. 내가 일을 그만둔지 2달, 지금처럼 외벌이로는 사실 유지도 힘들거다. 물론 이 벌이로 아이 둘, 강아지 둘까지 잘 키우는 집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알뜰살뜰 살지 못한다. 슬슬 돈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이제는 개인 플레이가 가능한 때가 지났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협의와 변화를 맞이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 변화가 생길 것이다. 난 삼년 반정도 직장을 다니지 않을 예정이다. 어떻게든 집에서 벌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도 나도 지금까지 돈 벌고 모으는데는 잼병이였지만 나중엔 그런 지금이 웃겼다고 생각할만큼 잘나갈거다. 택이는 돈복있게 생겼다. 난 내 직감을 믿는다. 


삼십분 빠르게 움직였다고 왠지 졸렸다. 택이가 자려고 뎁혀논 침대에 들어가 폰으로 웃긴글을 보며 소리내 웃었다. 평소 웃긴글을 잘 보지 않고 오히려 진지한 글을 자주 보고 질문하던 나였는데, 요즘은 폰보면서 웃으니까 택이가 신기한가보다. 뭐보냐면... 그냥 트위터 캡쳐 같은거. 참 웃긴 사람이 많다 세상에. 그러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1시간정도 자려 했는데 알람이 울리니 더 자고싶어 30분을 더 자고 깼다.


자고 일어나서 글을 쓰려 했는데, 왠지 책이 읽고 싶었다. 달달한게 땡겨서 빙수아이스크림을 책과 꺼냈다. 프랑스인들에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글인데, 읽으면서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했다. 책을 읽을땐 자주 멈춰 사유하고, 생각난 걸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는 편이다. 사실 대화를 제일 좋아하지만, 늘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비슷한 관심사나 대화수준을 가진 사람도 잘 없으니 혼자노는거다. 그러고 있으니 금방 한시간이 갔다.


우리는 화장실을 따로 쓰는데, 오늘은 택이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냥 샴푸를 뭐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괜히 들어가보고 싶었다. 택이처럼 깔끔했다. 샤워부스가 이렇게 좁은데.. 안불편하나 싶기도 하고, 디퓨저 두개랑 바디로션 두개가 눈에 띄었다. 택이같았다. 향에 민감하고, 향을 좋아하는 내 남자. 아, 건조기를 돌려야겠다 싶어 빨랫감을 옮겨 건조기를 돌렸다.


이러고 저러고 카센터에 가보니 2시가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4시. 무슨 부품을 시켜서 온대서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중간에 배고파서 나갔다가 짜장면이 먹고 싶었는데 다 브레이크 타임이라 한솥에 갔다. 진짜 오랜만이였지만 잡채볶음밥은 맛이 없었다. 그래도 식감이 좋아 전부 먹었다. 나오면서 또 달달한게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려 딸기우유를 샀다. 평소 택이가 집에 가득 채워놓아도 쳐다도 보지 않고 과일만 먹는데, 나오니까 또 이런게 땡긴다. 그래 밖에서 과일을 깎아먹고 다닐 순 없지.


다시 카센터에 왔는데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좋지 않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RPM이 바로 올라가지 않는 이유가 잘 잡히지 않는다고 다시 점검이 필요하다고 한다. 후.. 이제 오후 미싱 레슨도 물건너 갔다. 차가 내 스케쥴을 다 좀먹는구나. 누구나 싫겠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문제다. 그래도 일을 하지 않으니 급하거나 꼭 필요한 일정은 없다. 이전 차도 내게 처음왔을때 몇 번 서더니, 지금도 처음올때는 문제가 있구나.


다음엔 꼭 새차를 타봐야지. 그럼 아무 문제가 없으려나.. 아무래도 돈을 더 모아야겠다 싶어 지금 내가 얼마를 모았나 계산해봤다. 음, 너무 작은 금액에 실소가 나온다. 다음 집은 꼭 매매를 해야할텐데, 다음 차는 새 차여야할텐데. 그래, 일단 당장은 아니니까. 그래도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은 해야할거다. 아, 이런문제는 20대때 해결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ㅎㅎ 


이래서 다들 좋은 직장을 잡으라는건가, 돈 잘 버는 남편을 만나라는 건가. 임신했다고 출산했다고 크고 좋은 새 차들을 선물받던 친구들이 생각났지만, 금세 도리도리 했다.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이게 늘 최선의 선택이였어. 진짜 당장 힘든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웃긴 투정이겠어. 내가 벌어서 사줄 생각은 못할망정.. 참 못났다 나 지금. 간단한 일을 하려 해도 임신한 상황에, 솔직히 일을 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서 배가 뭉친적이 없다. 이 편안함과 건강의 중요성을 알기에 시기상조다. 


어쨌든 오늘 스케쥴 두개는 이미 날라갔다. 기다렸다가 컴퓨터센터랑 요가만이라도 들렸다 집에 가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렇게 액땜들이 오나. 그럼에도 감사해야지. 어쨌든 타고 다닐 차가 있다는 것에, 뱃속엔 건강한 아이가 있다는 것에, 당장 일하지 않더라도 세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하루에 할 일이 뭐라도 있다는 것에. 그래서 좋은일이 생기면, 또 생겼다 글을 쓰겠다. 오늘은 내가 심적으로 좀 지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녁 요가를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