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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pr 15. 2020

완벽히 다른 그와의 n주년

특별한 날의 박약독백

나와 완벽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문화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이 주에 10권씩은 무조건 빌려 책을 끼고 사는 나와 달리, 그는 나와 사귀는 n년간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늘 업데이트되는 영상물을 보고 최신 트렌드에 집중하는 그와 달리, 나는 테드와 세바시 말고는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 식성도 어찌나 다른지, 내가 사랑하는 유제품과 회를 그는 입에도 대지 못한다. 그가 사랑하는 치킨과 햄버거보다 나는 삼계탕이 더 좋다.


우린 동갑이지만 많은 게 다르다. 공대를 나온 그와 사범대를 나온 나. 공단에서 일하는 그와 문화판에서 일하는 나. 반복적인 업무의 그와 창조적인 업무의 나. 그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사랑하고 나는 변화와 도전을 사랑한다.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는 어찌나 다른지. 갈등 상황에서 조금 참아주는 그와, 내 분노를 끝까지 표현해야 발 뻗고 자는 내가 있다. 외모적으로도 하얀 나와 까만 그. 웃는 모습이 예쁜 그와 냉하게 생긴 나. 신나는 노래를 좋아하는 그와 재즈를 좋아하는 나. 새벽형 인간인 나와 올빼미형 그.


다른 사람과 오래 진하게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옳고 그른 사람은 없다. 나는 그의 안정감과 여유가 좋아 기댈 수 있고, 그는 나의 톡톡 튀는 개성이 재미있다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교과서는 그였다. 우린 가끔 말한다. 우리가 친구였다면, 친해질 수 있었을까? 둘 다 절대 아녔을 것이라 말한다. 오히려 서로 재수 없어했을 거라고. 맞다, 우린 지금도 가끔 서로 재수 없어한다.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사람의 인연은 따로 있는 걸까, 우린 어이없게 만나게 되었다. 당시 백수였던 내게 놀러 와서 맛있는 걸 사주라는 남사친이 있었다. 친구 생일파티 때 그냥 두어 번 본 사이였는데, 직장인이 백수에게 뭘 사주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원래도 냉한 구석이 있던 나는, 백수가 뭘 사주냐며 친구를 타박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 주변 백수들은 다 부자라고 했다. 안 그래도 요즘 가난한데, 짜증이 치밀어 그럼 시집가게 소개나 시켜주라고 했다.


내가 그 친구의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몰랐을까. 바로 단톡 방이 생겼다. 당황스러웠다. 당시 솔로이긴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도 나는 '얼빠'와 '취향 소나무'로 통했었다. 몇 가지의 항목을 정해놓고 그곳에 부합하는 남자를 딱 한 명 소개받아 사귀는 식의 연애를 했었다. 문제는 눈이 너무 높았던 것. 신기하게도 단 한 명을 소개받으면 바로 잘되곤 했어서 연애 공백기는 많지 않았지만, 이런 나에게 이성을 소개해주려는 친구는 사실 거의 없었다. 뛰어난 미모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나는 소개해주기 편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리둥절하게 초대된 그는 이름부터 촌스러웠다. 정말 아무런 기대가 생기지 않았다. 비어있는 카톡 프로필과 묘하게 촌스러운 말투에, 은근히 틀리는 맞춤법. 당연히 그냥 친구가 한 명 더 생긴 느낌이었다. 사실 그때까진 다음에 만날 일이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어쩌다 번호를 교환하고 바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았더니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00이라고 합니다. 00살이고, 00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뭐라 말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는 마치 깔끔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목소리가 설레서 그랬을까, 예의바르단 느낌이 들어서 그랬을까.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카톡방에서는 잦은 대화가 오갔고 그가 내가 다니던 크로스핏 근처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크로스핏은 우리 집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가 있는 곳이었는데, 버스가 자주 없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타던 나는 카드를 놓고 온 것을 깨닫게 된다. 도서관에 갔다가 중국어학원에 갔다가 크로스핏을 가야 하는데, 저녁을 굶게 될 판이었다. 평소 빈혈끼가 있어 크로스핏에서 핑하고 돌 때가 잦아 저녁은 꼭 먹어야 했다. 그때 그가 생각났다.


'카드를 놓고 왔어요. 저녁 사주세요'라는 연락이 그는 그렇게 설렜다고 한다. 근무가 끝나고 바로 오게 되어 옷이 엉망이라던 그. 미안하지만 그날 입고 온 플리스는 그가 연애 초반 입은 옷 중에 가장 세련된 옷이었다. 평균 남자 키보다 훨씬 큰 나는 그의 키를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거의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다. 어쨌든 그는 나보다 키가 훨씬 컸고, 체격이 좋았다. 외모적으로 타고난 것들은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알 수 없는 묵직한 뱅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대화 내내 어딜 봐야 할지 혼란이 왔다. 눈은 보이지 않고, 얼굴의 반 정도가 가려지니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춥다며 플리스를 목 끝까지 올려 입은 그는 배고프다며 가다 붕어빵을 사서 먹었고, 이런 고급진 레스토랑은 처음 와본다며 좋아했다. 식당에서 과하게 의자를 빼주었고, 밥을 먹고 내가 사준 핫초코에 감동했으며, 크로스핏에 몸 좋은 남자들이 많다며 걱정했다.


꽤나 부담스러웠다. 그중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그 앞머리였다. '얼빠'인 내게 사람 얼굴이 인식되지 않는 상황이라니... 넉살 좋고 덩치 큰 이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뭔가를 물어봤고, 다음엔 뭘 하자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어딘가 묘하게 촌스럽지만 우직한, 시골 총각 같았다. 단지 성격이 좋아 보여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만날 때에 그는 후드티 위에 코트를 입고 왔다. 나쁘지 않은 듯 나빴다. 묘하게 신경 쓰이는 패션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머리를 확 넘겨 올려 이마를 보이고, 셔츠 핏을 좋아했던 남자들을 주로 만났던 내게는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도 내가 그렇게 맘에 쏙 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나도 그냥 나쁘지는 않았다. 종합해보면 둘 다 그냥 그랬다. 그는 그냥 여자니까 잘해줬고, 난 그의 성격이 좋아 보였다. 아주 약간의 설렘과 함께 우리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는 가진 돈을 군말 없이 시킨 대로 잘 쓰는 남자였고, 캐주얼룩이 잘 어울리는 체형을 가지고 있어 이제는 내 친구들에게 스타일 좋다는 소리도 꽤 듣는다. 이렇게 잘생긴 이마와 눈썹을 모를뻔했다. 이제는 과거 사진을 보여주면 친구들은 동일인이 아닌 것 같다며 왠지 대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알고 보니 생일파티를 열었던 친구의 무리들은 나에게 그를 소개해준 그 남자에게 미쳤다며 등을 때렸다고 한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도 잘 꾸미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도 이런 내가 웃기다. 나는 과거부터 원하는 건 양보하지 않고 움켜쥐어야 했나 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우리의 조합은 장거리와 중장거리, 단거리를 거쳐 무탈히 n주년을 맞이하게 했다. 촌스럽지만 우직한 시골 총각은 조금 세련되었지만 여전히 우직한 시골 총각 마인드로 단 한 번도 관계에 불안감을 가져오지 않았다. 우린 사랑에 단단히 매였고, 단 한 번도  헤어지거나, 혹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연인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 선들을 둘 다 한 발자국도 넘지 않았거나, 혹은 넘고도 들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들이 내겐 감동이었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들이 그는 감동이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는 완벽히 달랐지만, 그게 n 년의 연애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 매개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낚시와 수영, 그리고 캠핑이라는 공통점도 찾았다. 아쉽게도 낚시와 수영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콘텐츠는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가 근처에 살아 꽤나 자주 간다. 소개해준 그 친구의 커플과 생일파티를 열던 그 친구의 커플과 다른 한 커플, 총 네 커플이 자주 함께 낚시와 캠핑을 다닌다. 여전히 소개해준 그 남자애와는 왕왕 입씨름을 한다.


운명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면, 난 그와 평생을 계획하고 싶다. 서로 완벽히 다른 그 틈에서 내가 놓친 것들을 다시 낚아채고 싶다. 계속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뻗어나가면 좋겠다. 앞으로 삶의 많은 이벤트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히 합치되지 않으면 좋겠다. 각자의 기세대로 뻗어나가면서, 서로의 차이를 보는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좋겠다. 삶에서 내가 옳다 기고만장하기 전에 다시 한번 곁을 돌아볼 수 있기를. 나는 그의 길을 언제까지고 축복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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