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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Jul 18. 2020

일상의 작은 이벤트

게으른 박약 독백

세 번째 제출하는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탔다. 작년에도 그림을 내지 않아 뭐라도 내보자며 한 달 전에 급하게 시작한 작업이었다. 평소 사진 촬영인 취미인 아빠의 사진 여럿에서 내 몇 장을 추려 인쇄했다. 이직하며 월급이 너무 작아져 계획했던 유화는 여전히 배우지 못하고 있다. 장소가 없어 에어컨도 없는 거실에 이젤을 펴놓고 캔버스를 채웠다. 주말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님의 아뜰리에에 들려 조언을 얻었다.


입선 두 번에 특선 한 번. 이제 4점을 모았다. 12점이 되어야 초대작가가 되는데, 몇 년이 남은 걸까. 1차에 합격해 그림을 내러 가는 날, 50호 그림들에 둘러싸인 30호의 내 그림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내년에는 50호를 내야지. 일 년간 유화를 배우지 못한다면, 이번 그림도 수채화일 터였다. 연습 몇 작에 50호에 가득 찰 물감 값, 또 그만한 사이즈의 원목액자 값까지, 올해 내에 감당할 수 있을까.


대회 한 번에 필요한 캔버스와 참가비만 해도 20만 원이 족히 넘는다. 당장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는 예술이 가끔은 사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딱히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수제자도 아닌데. 올해는 집에서 땀을 흘리며 완성했기에 살짝 씁쓸했다. 직업이 없을 때는 부모님이 보내준 돈으로 재료를 사곤 했는데, 직장인이 되고는 사치는 내 돈으로 부리기만 했다. 내게 기대지 않는 부모님의 사정에 감사하면서.


지원했던 사이버대학교에 편입생이 되었다. 4년제를 졸업하고 대학원생이 아닌 대학생이 되다니, 몇 년 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언젠가 대학원생도 될 테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4년제 대학이 없다. 문화 관련학과가 있는 가장 가까운 대학은 자차로 편도 두 시간 정도가 걸린다.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여차저차 합격을 했고, 이제 2년간은 공부하느라 종종거릴 예정이다.


운영하는 비영리단체는 코로나로 인한 사업변경이 되면서 사업금을 다 쓰려고 종종거린다. 거의 매주 행사가 열리고, 주에 몇 번을 하기도 한다. 예산을 받은 내역은 있는데 4-8명 참여 가능한 소규모가 되면서 파티도 몇 개가 엎어져 소모 임화 되었다. 방대한 양에 결과보고서를 쓰기가 두렵다. 회수가 많아져 준비하는 것도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다. 아직 우리 지역에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8월 중순까지는 내내 종종거릴 예정이다.


테이블 탈출이라는 아이템으로 탈출 미션을 짜는데 머리가 아프다. 항상 무언가를 시도할 땐 해보지 않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어려운 것을 목표로 두는데 그 과정이 재밌다. 아직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낼모레 친구들이랑 만나 회의를 해봐야겠다. 로컬 기반 야외 방탈출 게임도 설계해보고 싶었는데.. 큰 판들은 회사에 결정권이 있으니. 빨리 다복다복 준비해서 창업이나 프리랜서를 해야겠다.


최근엔 영상교육도 한다. pc에 익숙하지 않은 마을 교사들에게 영상 편집법을 알려주고 있다. 저작권 이론부터, 실제 영상편집 팁까지. 회사에 3회가 부족해 4회로 올릴 수 있는지 문의해뒀다. 편집 프로그램은 곰 믹스를 사용하고 있다. 평소에는 프리미어를 사용하는데, 곰 믹스도 기본적인 기능들은 잘 되어있다. 요즘 브이로그 같은 일상 영상은 간단한 편집기술로도 충분하다. 역시 아직은 휴대폰 어플이 더 쉬운 것 같지만, 나는 마우스가 없으면 답답하다.


회사에선 수많은 갈등들이 있다. 최근에 눈을 다쳤을 때, 다쳤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상사가 카톡을 읽씹 해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던 적이 있다. 원래도 상식이 없어 신기했던 사람이었는데, 인성은 학습으로는 구축할 수 없나 보다. 덕분에 반면교사를 아주 잘 쌓고 있다. 최근에 화가 난다며 물건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는, 아주 폭력적인 언행을 보였다. 내가 퇴사하는 순간, 이 작은 지역에서 그의 이름과 행위는 구체성을 띄겠지. 외부사람들은 대체로 이상함을 느끼지, 무엇이 잘못인지 뾰족한 포인트를 모르니까. 역시 사람은 내부 사람에게 잘해야 한다.


나도 단체를 운영하고, 문화행사를 하면서 곁의 사람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의 행동엔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과관계가 상식적이니까. 누군가에게 일을 줄 때는 부분을 쪼개 통째로 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알아서 하라'라는 말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를 살짝 피해 가는 법을 배웠다. 자세를, 태도를, 대화에서의 미묘한 변화를 알았다. 결국 모든 것은 아직 사람이 결정한다.


일상의 작은 이벤트들이 많은데, 하얀 캔버스를 채우고 하얀 배경을 텍스트로 채우는걸 참 좋아하면서도 꾸준히 하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쓰는 글과 오랜만에 잡는 연필은 언제나 내게 부끄러움을 준다. 뭐가 그리 바빠 일상을 기록할 힘도 없는 건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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