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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 Jul 01. 2022

조직에 적응하기 힘든 이유

입사한 뒤에 처음 팀장급 이상이 전부 모이는 회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장을 비롯해서 간부급 직원들까지 모두 참석하는 회식이었다. 회식 장소는 회사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나는 시간에 맞춰서 업무를 정리하고, 회식 장소로 향했다.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 그동안 안면을 익힌 나이든 여자 팀장들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황송하게도 내가 앉을 자리로 안내하는 것이다. 나를 챙겨주는 생소한 상황에 감사해하며,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전부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옮겨가서 함께 앉는 것이다.

'나랑 같이 앉는 게 아니었어?'


곧이어 회장이 입장했다. 회장은 내 바로 앞에 앉았다. 내가 앉은 곳은 정중앙의 상석이었고, 그들은 나를 그곳에 앉히기로 공모했던 것이다. 상황 파악을 하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회장, 부회장 등 조직의 어르신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어차피 그분들께는 업무상 자주 보고를 드리는 상황이었고, 나는 그런 자리라고 해서 크게 어려워하는 타입도 아니다. 나는 맛있게 식사를 하며, 예의있게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회식을 마친 뒤 사무실에 남겨놓은 가방을 가지러 가는 내 기분은 솔직히 복잡미묘했다. 여직원 무리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그 자리에 배정했던 건지, 그리고 회식 중에 나를 어떤 식으로 바라봤을 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상상이 안 간다. 그 뒤로도 나는 여러 번 회장 앞에 앉아야 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구석에 자리를 잡더라도 모두의 호들갑 덕분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내가 회장과 친해져야 한다'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내가 만약 계속 그 조직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몇 년 후의 나라면,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


조직의 리더를 모셔야 한다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떠올리면, 언제나 헛웃음이 나온다. 회식 때마다 비교적 젊은 여자를 나이든 부서장 근처에 배치하는 경우가 단지 나에게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객관적으로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조직에 새로왔다는 이유로 그런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여직원이 나이 많은 조직의 리더를 근거리에서 모시는 회식문화는 각 기관마다 자주 문제가 되었던 조직 내 성희롱 이슈들과는 무관한 걸까? 단지 젊은 여자라서, 아니면 조직에 새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러한 불합리한 일을 경험하는 게 당연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불쾌해진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리더십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중간 관리자급의 직원들이 모였다. 1박2일동안의 리더십 교육은 외부 초청강사들의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1일차 저녁 식사를 하고 모인 자리에서 강사는 개인 성향 테스트를 진행했다. 테스트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MBTI나 애니어그램은 아니었다. 테스트를 마친 뒤에 자리에 앉은 채로 강사가 유형의 이름을 말하면, 해당되는 사람은 손을 드는 형태로 다함께 결과를 확인했다.


우리들의 결과는 어땠을까? 약 50여 명이 교육을 받았는데, 강의실에 있던 대부분이 하나의 유형에 손을 들었다. 대충 확인해 보니, 6명 정도가 다른 성향에 손을 들었다. 조직원의 90% 정도가 매우 비슷한 성향이라는 눈앞의 결과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는 어느 그룹에 속했을까? 나는 나머지 10%에 속했다. 소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강의실 앞으로 불려나갔다. 강사의 주장대로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조직에서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강의실 앞에 대략 몇 명이 같이 서있는 상황이 재밌었다.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무대 위의 원숭이의 신세 같았다. '이렇게 다들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이 조직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거지.'


나는 검사 결과를 생각할수록, 이렇게까지 동질성이 높은 집단이 있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동안 조직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혹시 내가 다수의 조직원들과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서였을까.



나는 새로 합류한 사람이 그 조직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엔 일차적으론 기존에 있던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조직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조직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게 일터의 예의이다.


단순히 누군가가 어떤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를 100%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서는 안된다.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잘 하라고 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다. 그리고 늘 희생양을 찾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척하는 사고방식은 정말로 해롭다.


회사는 새로 사람이 들어오면 테스트부터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과연 잘 할 수 있는지 두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력직을 보면서, 과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 수 있는지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두고 보는 문화가 나는 참 별로이다. 이미 채용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그 사람에 대한 검증을 거쳤으면, 신뢰를 주는 게 먼저이다. 때론 '알아서 적응해야지, 알아서 인사하고 친화력을 발휘해야지' 이런 식으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막 태어난 신생아였을 때, 우리는 알아서 생존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생존하는 법을 돌봐주는 사람들로부터 배웠다. 직장생활을 하는 어른을 어떻게 갓난아기와 비교하냐고? 글쎄, 우리는 직장에서도 사회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능에 새겨진 최초의 사회화의 과정을 왜 일터에는 대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가 나는 더 궁금하다. 사람들은 믿음에는 믿음으로 보답하려고 애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는 없다. 나랑 조직인지, 맞지 않는 조직인지  살펴본 다음에 스스로의 잘못은 무엇이었는지 찾아봐도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에 조직 내에 부조리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판단이 서는 경우에는, 그것을 구태여 다음 사람들에게 물려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면접을 볼 때, 이전 직장에 대한 퇴사 사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이전 조직을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불문율처럼 생각하고 있다. 혹시라도 불만만 많은 사회부적격자로 오인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 까발려질 건 까발려져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피면접자가 이전 회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사실 면접관이 속으로 더 뜨끔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사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왜 회사에 대한 문제점을 공론화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결국 우리들은 음지에서만 회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과연 현명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는 좀더 나은 기업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저 불평불만을 공개적으로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일터에서의 문화가 정말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졌을 때,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도 바뀌게 될 거라고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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