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12월에 남은 휴가 전부 쓸게요.”
“그래, 그럼 계획을 알려줄래?”
B는 하루를 통째로 쉬는 대신, 주별로 2일씩 나누어 사용했다. 업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계획적으로 휴가를 쓴 것이다. 대표 역시 처음엔 놀라긴 했지만, 곧 이해했다. 이 일을 통해, 연차 사용 계획을 미리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달았다.
“직원들 휴가는 팀장님이 알아서 관리해 주세요.”
얼마나 쿨한가. 대표가 앞으로는 휴가에 대한 결재를 안 받아도 된다고 했다. 직원들을 전적으로 믿겠다는 이야기였다. 바쁠 때 회사가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그때 조율하면 된다고. 그리고 팀장인 나에게 휴가 권한을 위임했다니, 솔직히 대단하다고 느꼈다.
우리 팀은 신입이 많지 않았기에 기본적인 연차 제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1년 미만 근속자는 매달 1일씩 연차가 생기고, 1년 이상이면 연차 15일, 근속연수에 따라 최대 25일까지 늘어난다는 것. 법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권리지만, 직접 휴가를 계획하고 조율할 수 있는 자유는 생각보다 큰 의미였다.
내가 내 휴가를 내 마음대로 쓰겠다고 하는데, 왜 허락을 받아야 하나?
잡플래닛 리뷰를 보면, 연차를 마음껏 쓰는 직장은 늘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 회사는 연차를 사용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직원에게 ‘연차 시기 지정권’이 있음에도, 현실에서는 이를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A는 매월 꼬박꼬박 휴가를 챙겨 다녀오는 스타일. 좋은 여행지를 찾아 재충전하고 돌아온다. 반면 B는 휴일 없이 일만 하며 휴가를 쌓아 두었다. 12월이 다가오자, 나는 B가 남은 휴가를 어떻게 쓸지 궁금했다.
“팀장님, 12월에 남은 휴가 전부 쓸게요.”
“그래, 그럼 계획을 알려줄래?”
B는 하루를 통째로 쉬는 대신, 주별로 2일씩 나누어 사용했다. 업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계획적으로 휴가를 쓴 것이다. 대표 역시 처음엔 놀라긴 했지만, 곧 이해했다. 이 일을 통해, 연차 사용 계획을 미리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달았다.
야근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회사는 프로젝트로 늘 바빴다. 매일 철야하고, 새벽까지 남아 일했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노트북을 사주셨다. 하지만 그 노트북조차도 매일 같이 사무실에 있었다. 그만큼 회사에 몰두한 나날이었다.
점심시간에도 팀원 한 명은 밥을 먹지 못한 채 클라이언트 문자를 확인했다.
“지금 점심시간인데, 사무실 들어가서 회신하겠다고 하면 안 돼?”
“그러면 난리 날걸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밤을 새워야 할까.’
그래서 휴가를 떠났다.
필리핀 세부. 비행기표와 리조트만 예약해 놓고, 떠나기 전날까지도 야근에 쫓겼다. 리조트에 도착하자, 친구와 나는 일단 실컷 잠을 잤다. 물론 다음 날부터는 액티비티를 예약하며, 여유와 자유를 만끽했다.
휴가의 마지막 날 우리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둥둥 떠 있으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와, 이곳이 천국이네’, ‘너무 행복하다’를 반복했다.
주변은 너무나도 고요한데,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가장 힘들었던 때에 느낀 찐감정이었기 때문인지 그 순간의 편안함과 행복감은 잘 잊히지가 않았다.
휴가지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터에서 잠시 떨어져 본 경험이 그런 용기를 갖게 했다. 퇴사를 하겠다고 하니, 상사는 당황하며 한 달간의 유급휴가를 줬다. 그동안 주말도 없이 일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편안하게 쉬고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쉬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나는 회사로 돌아갈 힘이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나는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서운해하던 상사는 오히려 다른 회사를 추천해 줬다.
이후로 나는 거의 야근을 하지 않는다. 정시 퇴근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저녁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워라밸’이 점점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작은 일상의 반복, 빨래를 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사소한 경험 속에서 회복과 힐링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찍 퇴근하게 해 줬더니, 직장인 대부분이 술집에 모여 있더라'는 말도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나 역시 여유 있는 시간을 통해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들에 도전해 보기도 하고, 퇴근길에 장을 봐서 저녁을 직접 만들어서 먹기도 하면서 가족이나 친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렇게 나 스스로를 돌본 시간들이 회사에 있던 시간들보다 나를 더 많이 성장시켰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그저 주어진 일만 하게 된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욕먹지만, 그렇다고 시키는 일을 제대로 못하면 잘린다. 아무리 혁신과 창의를 외친다고 해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 테두리 내에서의 자유이다. 굳이 '회사 노예'라는 말을 붙이고 싶진 않지만, 근로자들은 자유를 일부 속박당한 상태인 건 맞으니까. 하지만, 회사에서 계속해서 같은 일만 반복하고, 다른 주제의 일을 다양하게 접할 기회가 없다 보면, 시쳇말로 바보가 된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될 수 있지만, 다방면의 상식이 부족해진다.
지금은 ‘대 퇴사의 시대(Great Resigna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자진해서 퇴사를 감행하며, 자신의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내 옆의 차장님의 모습이 자신의 십 년 뒤라고 생각하니 갑갑했다거나, 경제적 자유를 이룬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인증 글은 너무나 많다. 이렇게 빠른 은퇴를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서, 회사 일에만 매몰되어서 인생을 보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지를 깨닫게 된다. 그저 안전지대(safety zone)에 머물러 있다 보면, 미래의 대안을 찾을 시간이 없다.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 일에 몰두하느라 사회적 뉴스조차 챙기지 못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회사에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들이 워낙에 바빴던 탓에, 회의실에 들어가면 몇 시간씩 감금되다시피 했고, 매일 같이 철야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 유영철이라는 유명한 살인마가 아현동에서 활동했다. 나를 비롯해서, 우리 회사의 직원들 중에 아무도 뉴스를 챙겨보지 않아서 연쇄살인마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유영철 사건처럼 중요한 사회 사건도 몰랐던 그때, 나는 회사와 나 자신이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작은 순간들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업무에만 몰두하다 보면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나 주변의 변화,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들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중간중간 잠깐의 휴식, 관심 있는 일을 시도하거나 몸과 마음을 살피는 시간 속에서, 나는 단순히 쉬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루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선택할 수 있을 때, 회사 안에서의 평가와 압박에만 얽매이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지금 나는, 작은 쉼과 자기 돌봄 속에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매일을 더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