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무한리필’ 간판을 내걸고 고객을 유혹하는 식당들이 종종 눈에 띈다. 나는 평소 이런 공짜에 가까운 마케팅을 신뢰하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 보면 예상대로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런 곳을 외면해 왔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여행을 계획하며 남편이 한우로 유명한 횡성을 지날 때 한우로 한끼를 먹자는 제안을 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흔쾌히 제안에 동의했다. 고기라면 무한대로 흡입하는 아이들이니 후기가 괜찮은 무한리필 고기집에 가보자는 말에 잠시 고민을 했지만 후기가 좋다는 말에 믿어보기로 했다. 수천건의 방문자 리뷰를 믿어보자!
영업시간에 맞춰 도착한 식당은 영업 시작과 동시에 손님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열심히 고기를 구워 아이들에게 건네며 먹기 시작했지만, 한우의 맛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고기가 너무 질긴 나머지 둘째는 한참을 씹다 결국 종이컵에 뱉어내기까지 했다. 기대했던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배가 고프니 구워주는 대로 먹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예민한 미각은 솔직하다.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포만감만으로는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수천건의 방문자 리뷰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맛’은 단순히 혀로 느끼는 미각만이 아니다. 음식의 성분이 침에 녹아 미뢰에 닿을 때, 미각뿐만 아니라 후각과 촉각이 함께 작용해 '맛'을 느끼게 된다. 사실 우리가 맛이라고 느끼는 것의 80%는 후각이 담당한다고 하니, 미각은 후각, 촉각, 그리고 시각까지 결합된 복합적인 감각이다. 여기에 추가로 시각적 요소도 상당히 중요하다. 어떻게 플레이팅을 하냐에 따라서도 같은 음식의 맛은 다르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인간의 미각은 다른 동물들보다 민감한 편인데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미뢰가 많아 맛에 예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집 두 녀석도 맛에 상당히 예민하다.
사람마다 맛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검사로는 '미맹 검사'로 알려진 페닐싸이오카바마이드(PTC) 감수성 검사가 있다. PTC 수용액을 종이에 찍어서 혓바닥에 대고 쓴맛을 느끼는가를 검사한다. 미맹은 여러 유전 요인과 환경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형질이다. 그중 특히 TAS2R38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2가지 형태가 PTC 맛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 중 특히 PTC 용액을 맛보면 너무나 써서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특히 맛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뢰를 검사하는 시약으로 혓바닥을 조사해보면 이렇게 민감한 사람들은 혀가 시퍼렇게 물든다. 반대로 미맹들은 혓바닥에 푸른 점이 몇 개 찍혀있는 정도로 그치기도 한다. 맛에 민감한 사람들은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에게 많이 분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싫어하는 쓴맛을 내는 야채 같은 음식은 동양권 사람들이 더 많이 먹는다. 동양권에서 야채를 그냥 먹지 않고 기름에 볶거나 데치는 등의 요리법이 발달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사람들 중 약 25%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미각이 매우 예민한 사람을 초미각자(슈퍼테이스터:supertaster)라고 부른다. 무슨 초능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쓴맛에 대한 민감도가 3배 이상 높다. 즉, 알칼로이드 구분 등에 특화되어 있다. 초미각자는 본래 원시 사회에서는 더 유리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채소나 생선과 같은 건강 식품들을 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달거나 짠 음식을 타인들보다 강하게 선호하다보니 심장병, 대사증후군 발병 확률이 높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주로 커피, 토닉 워터, 녹차 등에서도 쓴 맛을 강하게 느껴 대다수가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위키)
미각에 대한 이글을 쓰며 두 녀석에게 ‘페닐싸이오카바마이드(PTC) 감수성 검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쓴맛을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니, 아이들의 예민한 미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미각이 예민한 아이들을 키우면서 ‘별나게 왜 그래!’라고 핀잔을 주었던 나 자신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과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