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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Sep 15. 2019

나의 새벽은 당신의 것보다 더 길다

아르바이트 잔혹사 (2)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고시원 침대에 드러누워서도, 알바천국과 알바몬을 병적으로 들락날락했다. 혹시 5분 사이에 새로운 공고가 올라왔을까 하는 조바심에 쉴 새 없이 새로고침을 눌러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려야겠다.'라는 효심 어린 생각은 점차 '언제 구하나 보자'라는 악에 받친 오기로 변했다. 처음에는 새벽에 하는 편의점이나 호프집 아르바이트 자리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뽑아주기만 한다면 넙죽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느 때처럼, 봤던 아르바이트 공고도 또 보고, 괜히 다시 한번 자격요건이나 읽어보다가, 새로고침도 누르면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맨 위에 못 보던 공고가 떠올랐다. '어?' 다급하게 공고를 눌렀다.


'20세 이상 (1994년 이후)'

'OO대학교에서 도보 5분'


더 이상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거다. 나이 제한도 없고,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공고를 자세히 읽어봤다. 아 제기랄. 제일 피하고 싶었던 호프집 서빙 아르바이트였다. 심지어 공고 중간에는 '금, 토, 일 PM 6:00~AM 3:00'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다. 제일 피하고 싶었던 조건 두 개를 내밀면서 '야이ㅎㅎ 이래도 안 올 거야? 응?' 하며 나를 기만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주말 새벽에, 서울에서 핫하다는 이 동네에서 호프집 서빙 아르바이트라니. 하지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이것마저 놓치면 아르바이트고 뭐고 포기해야 한다. 평소였다면 괜히 통화하는 게 거북해서 문자메시지를 남겼겠지만, '이거 놓치면 끝이다'라는 심정으로 공고에 올라온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알바천국에서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아, 예."

"아르바이트생 뽑으시나요?"

"네, 뽑아요. 혹시 어디 학교 다녀요?"


대뜸 다니는 학교를 왜 물어보는 거지? 뭣 때문이지는 몰라도 대답은 해야 한다. 대답을 해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열심히 짱구를 굴려본 결과, 아마 학교에서 가까운 데에서 사는 사람 뽑으려는 듯 다. 근데 나 여기 학교 안 다니는데 OO 대학교 다닌다고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한 달만 일할 건데, 뭐.


"아, 저 OO 대학교 다닙니다."

"오, 그래요? 언제 올 수 있어요?"

"전 오후엔 다 괜찮아요."

"그럼 지금 오실래요? 여기 위치가..."


된 건가? 수화기 너머 아주머니가 뭐라 뭐라 가게 위치를 설명해줬지만, 귓구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기계적으로 예, 예 하면서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르바이트 공고에 나와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고시원에서 2분 거리, 걸어 2분 거리였다. 다행이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일하는 시간이었다. '금, 토, 일 PM 6:00~AM 3:00'. 꼬박 9시간을 쉬지 않고 일 할 수 있을까? 일하는 시간은 둘째 치더라도, 서빙이라는 업무 자체도 낯설다. 어떻게 일하는 거지? 대충 주문 들어온 음식만 갖다 주고 하면 되는 걸까? 새벽에는 어떻게 일하지? 학교 다닐 때도 새벽에는 리다고 공부도 못 하고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만 기억난다. 그러던 내가 1살 더 먹었다고, 서서 8시간, 9시간을 일할 수 있을까 싶은 불안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갈망하던 아르바이트 자리였지만, 막상 구하고 나니 잠시 미뤄뒀던 크고 작은 걱정들이 장마철에 둑 터지듯이 밀려들어왔다.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해본 적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한숨 자고 생각해보자. 힘없이 침대 옆 전등을 껐다.


다음 날 오후, 걱정 반, 떨림 반으로 책상 구석에 던져뒀던 이력서가 담긴 봉투를 끄집어 들고, 핸드폰과 지갑을 주섬주섬 챙겨 나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도, 면접 볼 곳에 도착했다.



X
X
X



초록색 간판에 쓰인 호프집 이름을 한 번 되뇌고,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띠링-' "어서 오세요!" 점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외치며, 일제히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쏟아냈다. 내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일행들의 눈초리마저 따갑게 느껴졌다. 이력서가 든 봉투만 어색하게 잡고 쭈뼛쭈뼛 서있는 나를 보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어색함을 다.


"면접 보러 왔어요?"
"얘기 들었어요. OO 대학교 다닌다면서요?"
"예예..."
"어디 과 다녀요?"
"정치외교학과 다녀요."
"이야, 좋은 과네~"

나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에 갓 스무 살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이력서 필요하세요?"
"아이, 무슨 이력서예요, OO 대학굔데~"

양심의 가책이 밀려오다가도, 됐다 싶은 생각이 더 들었다. 어차피 지금은 OO대에서 수업 듣고 있는 거니까, 괜찮아하면서 괜히 스스로를 자기 합리화했다. 사장님은 웃으며 나에게 일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여기는 1번 테이블이고,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2, 3, 4번 테이블이고..."
머릿속에 테이블 번호를 억지로 쑤셔 넣었지만, 렉 먹은 컴퓨터처럼 버벅거렸다. 대충 1번부터 10번까지는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겠는데, 그 이상부터는 테이블 위치는 고사하고, 테이블 번호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1번부터 20번이 넘는 테이블 위치를 속사포로 내뱉고서야 "어때요? 외울만해요?"라고 물으셨다.

"어... 지금 처음이라서 그런지 조금 헷갈리네요."

멋쩍게 웃으며 애꿎은 뒤통수를 긁었다.

"괜찮아, 괜찮아. 명문대생이 이것도 못 외우겠어?" 사장님은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명문대생'이라는 단어를 지겹도록 붙여 말했다. 별 것도 아닌 대학 간판 하나에 이렇게까지 열광해야 하는 걸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뉴스에서 한창 그렇게나 지적하던 '학벌지상주의'라는 게 이런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테이블 위치를 알고 나서는, 주문받은 내용을 포스기에 입력하는 법, 주방이모들에게 주문받은 내용을 전달하는 법,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법들을 속성으로 배웠다. 정신없다. 띵동. 4번 테이블이다.

"저기 가서 주문받아와요."

준비라고는 하나도 돼 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방금 외웠던 4번 테이블에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조심스레 걸어갔다. "어떤 거 주문하시겠어요?"

"저희 이거랑, 이거랑, 생맥 500CC 2개 주세요."

들고 있던 종이에 대충 휘갈기고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이모, 이거랑 이거 주문이요."

이 정도면 됐겠지?

"포스기에 찍어야지." 아, 포스기.

"이거 안 찍으면 주방 쪽에도 전달 안 돼. 나중에 네가 기억해서 계산할 거 아니잖아? 잘 찍어둬."

정신없이 이 곳 저곳에서 주문이 들어온다. 띵동- 띵동- 숨 돌릴 틈도 없이 온갖 테이블에서 벨을 눌러댄다. 막상 가보면 물티슈 주세요, 물 주세요. 같은 시답잖은 주문들이다. 그런 건 셀프로 했으면 좋겠다. 괜히 식당 같은 곳에서 '물은 셀프입니다'라고 써붙여있는 게 아니었다. 테이블에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손님들은 당장이라도 안 오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마냥 쉴 새 없이 테이블의 벨을 눌러댄다. 정신이 없다.  여기저기서 몰아닥치는 주문들을 허겁지겁 처리하다 보니, 싱크대에 맥주잔이 잔뜩 쌓인다. 뒤에서 누군가 툭툭 친다.

"저거 설거지 해. 주문은 내가 받을 테니까."

깊고 좁은 맥주잔들이 싱크대에 세울 틈도 없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싱크대에 올려져 있는 것은 주방세제, 그리고 변기솔 같이 긴 막대기에 감긴 수세미. 같이 일하는 형은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해. 대충 세제 묻혀서 닦고 물로 헹구고, 냉장고에 넣어놔. 뒤에다가 쌓아놓으면 돼."라고 속사포처럼 말했다. 하아, 일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도망가고 싶어 진다. 아니, 이거 이렇게만 닦으면 설거지가 되나? 입 닿는 부분도 제대로 안 닦는데?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맥주잔은 끊임없이 쌓인다. 느려 터진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데도, 도무지 잔이 줄지를 않는다.

미친 듯이 설거지를 끝내고, 뭐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주문을 받고 나서야 12시가 넘었다. 주방에서 이모 한 분이 갓 구운 한치와 땅콩을 들고 나오셨다. "오늘 처음 온 거지? 이거 먹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뭐 했지. 이렇게 쎄빠지게 일해야 4,860원을 받는다니. (2013년 최저시급은 4,860원이었다.) 근데 이 안주가 저녁인 건가. 밥 대신에 안주라니. 잠깐 쉬는 동안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피곤에 찌든 손가락으로 땅콩 한 움큼을 집어 들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던 형이 말했다.

"원래 3시까지 일하는 건데 오늘은 첫날이니까 일찍 가라. 내일은 화장실 청소도 해야 돼." 스무 살 막내라고 이것저것 다 하는구나.

"이거 다 먹고 가봐. 마감은 내가 칠라니까." 나름 첫날이라고 일찍 보내준다는 말에 피곤에 찌들어있던 몸뚱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이 솟구친다. 몇 가닥 안 남은 한치를 마저 입에 넣고선, 바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가 볼게요."

힘들다. 몇 시간 서있었다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내일은 더 힘들겠지.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오늘은 그저 오늘이 끝났다는 것에 감사하자, 언제나처럼 고시원으로 가던 골목길이었지만, 그 날은 유난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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