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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Sep 13. 2019

20살, 이력서에 쓸 말이 없었다.

아르바이트 잔혹사 (1)


20살에 먹고사는 고민을 굳이 해야 할까?


20살에 대학을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대학 가면 네가 알아서 먹고살아라." 솔직히 고등학생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막연하게 '내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갓 스무 살인 대학생이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때문에 막연히 부모님이 어느 정도는 지원해주시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다행히(?) 부모님은 한 학기 동안 기숙사비며, 생활비 등을 지원해주셨고, 덕분에 노동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먹고살만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첫 학기가 정신없이 끝나고 나서, 여름방학에 신촌의 모 학교에 한 달 동안 계절학기를 들으러 가게 되었다. 살면서 신촌에서 수업 한 번 정도는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스무 살의 패기 어린 호기심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한 달 남짓한 계절학기 기간 중에 월세 방을 얻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준이었고, 그렇다고 집에서 통학하기에는 왕복 4시간을 견디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학교 근처에서 한 달에 23만 원짜리 작은 고시원에 방을 잡았다. 매일매일 아침 9시 수업을 들으러 부랴부랴 일어나, 4시간 연강을 듣고 집에 와서 노트북으로 게임이나 하는 비루한 생활을 영위한 지 일주일쯤 됐을 때였다.


'알바해야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한테 고시원 월세와 생활비를 다 받으면서 사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오전에 수업이 끝나고 나서 고시원에서 저녁까지 게임이나 하고 있을 바에, 차라리 그 시간에 알바나 하자는 생산적인 마인드로 '알바천국'과 '알바몬'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부지런히 찾았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 되어 사회에 나온 햇병아리를 위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이 최소 21살 이상의 사회생활 좀 해봤거나, 대학생 2학년 이상인 사람을 구하거나, 혹은 20살 이상의 여자를 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이 제한이 없는 곳이라면 군필자만 뽑거나 해당 직종에서 일해 본 경력이 있는 경력직만 뽑는 곳도 더러 있었다.



어디서 쌓냐고


나 같은 사람은 어디서 일해야 되는 거지?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스무 살은 일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건가? 괜히 어리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 같았다. 누구는 젊을 때가 좋다고 한다지만, 적어도 아르바이트 시장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몇 시간이 넘게 학교 근처의 아르바이트 공고를 미친 듯이 뒤지고, 지하철로 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까지 이 잡듯이 뒤져봤지만, 이렇다 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더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어 군필자 우대나 여성 우대가 아닌 아르바이트 공고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보내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안 뽑으면 어쩔 수 없고, 면접이라도 보자는 마인드로 알바공고가 올라온 수없이 많은 곳에 "알바천국에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20살 대학생인데, 혹시 알바생 뽑으시나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가끔은 방문해서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곳도 있었다. 학교 앞 알파문구에서 태어나서 처음 이력서 한 묶음을 사서, 주민등록증 만들 때 찍었던 증명사진을 왼쪽 위에 붙였다. 주소, 이름, 주민등록번호, 인적사항을 쓰다 보니, 밑에 이력을 적는 란이 있었다.


13년 2월 / XX 고등학교 졸업


고작 한 줄이었다. 더 이상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학교 입학한 것도 써야 할까?


13년 2월 / XX 고등학교 졸업

13년 3월 / OO 대학교 입학


중학교 졸업까지 쓰려했지만, 도무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달랑 두 줄. 20년을 쉴 새 없이 달려온 내가 종이 한 장에 내 인생을 요약한 전부였다. 일 한 경력도 없고, 그와 비슷한 공부를 한 것도 없는 내가 가게 점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애꿎은 볼펜만 만지작거리다, 괜히 손가락으로 한 바퀴 휘릭 돌려보면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감상했다. 더 이상 들여다봐야 나아질 것은 없다는 것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흰색 봉투에 대충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혹시라도 올 지도 모르는 연락을, 그저 '내일 면접 보러 오세요'라는 짧은 답장을 오매불망 기다리면서 조용히 맥주 한 캔을 깠다. 20살, 남들은 청춘의 시작이라면서,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20살 이라지만, 나에겐 어리다는 이유로 일 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 날 처음, 나는 중, 고등학교에서 착실하게 출석하고, 공부하던 그런 성실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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