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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Sep 22. 2019

나가! 옷 벗고 나가!

아르바이트 잔혹사 (3)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았던 호프집 서빙도 일주일이 지나자 슬슬 손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큼직큼직한 일들만 어느 정도 배웠다 할 뿐이지만, 엄청난 일을 해낸 것처럼 흐뭇했다. 물론 이런저런 칵테일 만드는 방법이나, 주문 들어오는 맥주 별로 잔들을 세팅하는 것들은 배우지도 않았다. 고작 해봐야 크고 작은 컵들을 설거지하고, 테이블에 쌓인 술잔과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 갖다 놓고, 새벽에는 잔뜩 쌓인 쓰레기들을 버리는 기본적인 일들만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박수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설거지도 어느 정도 속도가 붙어 저녁 8~9시 피크 타임에 쏟아져 나오는 맥주잔들이 마냥 무섭지는 않았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맥주잔들을 쌓고서, 물에 퉁퉁 부은 손가락을 유니폼에 대충 슥슥 닦고서 카운터에 기대 주문을 기다리는 것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아유, 힘들다. 적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힘든 건 어쩔 수가 없다. 기본 안주로 나가는 뻥튀기와 김가루가 뿌려진 막대과자를 저녁 삼아 주문이 들어오기 전까지 쉴 새 없이 입 속에 쑤셔 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먹어야 했다. 5000원도 안 되는 시급에 저녁 값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이 곳에서 뭐라도 하나 더 챙겨갈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과자들 뿐이었다.


나가! 옷 벗고 나가!

그 날따라 주말인데도 가게는 한산했다. 평소였다면 전광판에 불이 나게 주문이 들어왔을 테지만,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웠다. 한 잔씩 거하게 걸치고 온 일행들이 술기운에 이 메뉴, 저 메뉴를 주문할 때를 제외하면, 매일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녁 9시. 스무 개 남짓한 테이블들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때였다. 띠링- 손님 왔다. "어서 오세...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이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뭔가 화가 단단히 난 듯한 표정으로, 출입문 앞 옷장 앞에서 팔짱을 끼고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했구나 싶었다. 근데 나 뭐 잘못한 것 없는데? 안주 좀 집어먹었다고 그런 건가? 진짜 쪼잔하네. 구시렁구시렁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장님이 손을 까딱하신다. 무엇 때문이지는 몰라도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된통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사장님에게 갔다.

"옷 벗어."

예?

"벗으라니까? 안 들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정말 그 과자 집어먹은 것 때문에 그런 걸까? 갑자기 이렇게 들어와서 나가라고 한다고? 왜?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가! 옷 벗고 나가!"


어쩔 수 없다. 벗어야지.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얌전히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어 옷장에 던져놓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내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인사고 뭐고 할 수 없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출입문을 힘없이 열고 터덜터덜 초록색 계단을 내려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하고 싶었던 아르바이트였는데, 그 끝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해고라니. 애당초 아르바이트를 할 운명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번번이 연락 한 두 통조차 받지 못할 정도였다면, 일찌감치 포기했어야 했다. 서럽다.


밖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들고 오지 않았다. 비가 올 것이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고, 비가 온다는 말은 더더욱 듣지 못했다. 아니 우산은 중요치 않았다. 머리에 옷이라도 대충 뒤집어쓰고 달려야 했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비를 피할 의지조차 없었다. 가게 앞 아스팔트 바닥은 비에 젖어 번들번들해졌다. 퇴근시간이 되기에는 아직 몇 시간이 더 남았다. 문득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위를 내딛는 것이 어색해지고, 저녁시간에 하게 켜진 가게들의 네온사인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던 그 길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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