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 Ko Nov 03. 2018

2016년 11월 어느 날, 퇴근길에서

그 날 먹었던 순대국밥을 기억하며

늦은 밤이었다. 눈송이가 되지 못한 설익은 빗방울들이 잔뜩 쏟아져 내려왔지만, 길바닥에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산이 부서져 눈송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운이 좋게도 일부는 자동차 보닛과 앞 유리에 내려앉아 눈꽃을 수줍게 펴보았지만, 아직 세상에 내려오기는 조금은 일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일이 끝나고,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힘겹게 45인승 통근버스에 올라타 창문에 가만히 몸을 기대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 신경도 안 썼을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나 바깥 풍경 하나하나가 눈동자에 선명히 맺혔다. 한동안 멍한 눈빛으로 창문 밖을 뚫어져라 쳐다본 후에야 창문을 가득 덮은 이슬들을 잔뜩 닦아냈다. 뭉쳐진 이슬이 주르륵 흘러내려 유리창이 반들반들 해질 때쯤, 후드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이내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지 못하고, 덜컹거리는 진동을 자장가 삼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었을까.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는 폼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나 보다.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내리기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늘 그렇듯 인사치레로 기사 아저씨에게 한 마디씩 건네면서 내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지만, 오늘 하루도 수고한 나 자신과 그리고 당신들을 위해 나지막이 읊조리며 하루를 경건히 끝마치는 일종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9시. 힘들게 끝마친 하루였지만, 내일 새벽이면 졸린 눈을 비비고 또다시 이 곳 통근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것이다.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저 멀리 들어오는 통근버스를 썩은 동태 눈깔로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다. 으슬으슬한 날씨에 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사 온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손에 쥔 채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이 시간만큼은, 다가올 초췌한 새벽은 잠시나마 머리에서 지야겠다.

 

한 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집 근처를 지나가는 511번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은 뭐 먹지. 야근이 끝나고 집에 갈 때쯤이면 뭔가 야무지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일하면서 먹는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는 도무지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구내식당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치여, 1분이라도 더 쉬기 위해 급하게 위장에 음식들을 쑤셔 넣다 보면, 그곳에서의 식사는 맛있게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배를 채우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라도 들러서 뭐라도 먹을까? 1,800원짜리 편의점 김밥에 900원짜리 컵라면이면, 3,0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그럴듯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만 드 잔액은 만 원이 채 남지 않았다. 아직 월급이 들어오려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겠지만, 오늘은 왠지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다. 편의점 도시락처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그런 영혼 없는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 한 끼를 하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문을 열었을 만한 식당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헤맸다. 다른 곳은 이미 셔터를 내렸지만, 유독 한 군데는 환하게 불 켜고 있었다. 

                              24시 청진동 해장국

 

"순댓국 하나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깍두기와 다대기, 새우젓이 식탁 위에 올랐다.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가득 담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오래간만에 식당에서 먹는 물이라 그런가, 물조차도 맛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주 한 병이라도 시켜놓고 순댓국을 안주 삼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내도 새벽잠을 이겨내고 통근버스를 타야 했다. 오늘처럼 피곤에 찌든 몸에 몇 잔 들어가기라도 하면,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뜰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컵에 담긴 물만 들이마셨다. 주문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뚝배기에 순댓국이 가득 담겨 나왔다. 후릅. 가볍게 국물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구수하다. 조금 밍밍한 순댓국에 벌건 다대기를 한 스푼, 두 스푼을 넣었다. 이제야 살짝 얼큰한 듯하면서도 적당히 간이 잘 맞는 것 같다. 발갛게 물든 순댓국에 밥 한 공기를 넣고 잘 말아서 그 위에 잘 익은 깍두기 하나를 올려 입 안 넣었다.


아, 개 맛있다. 더 이상 무슨 말로 이 맛을 형언할 수 있을까. 어깻죽지를 따뜻하게 감싸는 순댓국밥 한 숟갈로 하루 종일 추웠던 몸과 마음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점점 몸이 뜨거워진다. 코에는 콧물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뚝배기에 고개를 처박고, 그릇 밑을 향해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해댔다. 하지만 물류창고의 구내식당에서 1분이라도 더 악착같이 쉬어보겠다고, 허겁지겁 밥을 먹어대던 그 숟가락질과는 너무도 달랐다. 밥을 먹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던가? 뚝배기 끄트머리에 남은 국물 한 모금을 싹싹 훑어먹고,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아, 잘 먹었다.

가끔은 여기서 저녁을 먹어야겠다.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한, 피곤한 하루를 끝 마치고 나면, 이 곳에서 근사한 한 끼를 해야겠다.

이전 06화 내 돈 내놔! 이 자식들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